[테크&인사이트] AI 시대, 해마는 안녕하십니까


AI 시대, 해마는 안녕하십니까

 

콘텐츠실장 안경애

 

어린 시절 연을 날리다 끊어진 연실을 쫓아 헤맨 경험. 낯선 나라를 여행하다 처음 보는 풍경에 이끌려 지도도 없이 골목골목을 걸어본 시간. 누구나 한 번쯤 있는 ‘헤맴의 기억’이다.

그 순간 우리 뇌에서 분주하게 작동하는 기관이 바로 ‘해마’다. 해마는 기억과 공간 개념을 관장하지만 실제 역할은 훨씬 역동적이다. 특정 경험과 관련된 시간·장소·감정을 조합해 하나의 연결된 이야기, 즉 기억을 만들어낸다. 해마 덕분에 우리는 머릿속에서 지도를 그리고 낯선 환경에서도 길을 찾는다.

더 흥미로운 점은 해마가 과거를 저장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미래를 상상할 때도 과거 경험을 다시 조합한다. 가보지 않은 여행지를 머릿속에 그리거나 어떤 선택의 결과를 예측할 때, 해마는 기억을 바탕으로 가상의 시나리오를 만든다. 해마는 ‘기억 저장소’인 동시에 ‘미래 시뮬레이션 엔진’인 셈이다.

 

해마가 유달리 큰 직업군

그런 해마가 기능을 잃으면 어떻게 될까. 미국의 유명한 사례인 ‘환자 HM’은 뇌전증 치료를 위한 수술로 양쪽 해마가 손상된 뒤 새로운 장기 기억을 만들지 못했다. 매일 만나는 사람도 새롭게 기억하지 못했고 방금 나눈 대화도 곧 잊어버렸다. 해마가 인간의 학습과 기억에 얼마나 핵심적인지 보여준 사례다.

반대로 해마가 유달리 발달한 직업군이 있다. 바로 택시기사다. 런던대학(UCL) 연구팀은 복잡한 도로망을 외워야 하는 런던 택시기사들의 해마 특정 영역이 일반인보다 크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이 연구는 성인의 뇌도 반복 훈련과 경험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는, 이른바 ‘뇌 가소성’을 입증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뇌의 ‘운전대’를 AI에 맡기면?  

지금 우리는 또 다른 전환점에 서 있다.

과거에는 내비게이션이 길 찾기의 일부를 대신했다면, 이제는 생성형 AI가 기억·정리·검색·초안 작성 같은 인지 작업의 일부를 대신하고 있다. 편리함은 분명하다. 그러나 모든 과정을 기술에 맡기면 인간의 해마가 수행하던 기억과 탐색의 일부가 기계로 넘어간다.

최근 일부 초기 연구에서는 AI 의존도가 높을수록 학습 내용의 내재화 수준이나 자기 효능감이 낮아질 가능성이 보고된다. AI에 기억과 학습을 맡긴 ‘인지 아웃소싱’의 결과다.

직접 읽고 고민하고 실패하고 다시 수정하는 과정에서 얻은 지식은 오래 남는다. 반면 AI가 대신 써준 보고서와 콘텐츠는 결과물은 남아도 경험은 남지 않는다. 결국 ‘내 것이 아닌 내 것들’만 쌓인다.

서울대 이인아 교수(뇌인지과학과)는 해마 속에는 사람마다 고유의 ‘맥락 정원’이 있다고 말한다. 길을 잃어 헤매고 틀리고 다시 고치는 과정에서 생기는 삶의 지도다.

 

질문과 경험이 키우는 ‘조직의 해마’

개인뿐 아니라 조직에도 ‘해마’가 있다. 수십 년간 쌓아온 고객 데이터, 프로젝트 실패 기록, 베테랑 직원의 암묵지, 산업 현장에서 몸으로 터득한 노하우, 구성원 사이의 살아있는 소통이다. 이런 기억들이 연결될 때 조직은 상황을 읽고 미래를 예측하며 더 나은 결정을 내린다.

조직의 해마를 단련하는 출발점은 질문이다. 우리는 누구를 고객으로 보는가? 왜 이 방식대로 일하는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새로 배워야 하는가?

질문은 새로운 경험을 받아들이고 기존 기억을 재구성하게 한다. 질문이 멈춘 조직은 학습도 멈춘다. 새로운 경험을 기억하지 못하는 ‘환자 HM’과 다르지 않다.

창의성과 호기심도 중요하다. 낯선 사람을 만나고 다른 분야의 언어를 접하고 예상 밖의 경험을 할 때 새로운 아이디어가 탄생한다. 인간의 해마가 서로 다른 기억 조각을 연결해 새로운 지도를 만들듯, 혁신도 그렇게 시작된다.

AI는 우리의 인지 능력을 확장하는 도구일까, 아니면 대체하는 기계일까? 답은 우리가 해마를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

결국 AI 시대의 진정한 승자는 가장 고도화된 기술을 도입한 조직이 아니다. 기술이 대신할 수 없는 영역, 즉 경험의 내재화와 비판적 질문을 통해 더 단단한 ‘조직의 해마’를 구축한 곳이다. AI가 길을 안내할 수는 있어도 길을 만드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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