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Letter “스스로 한계를 짓는 것이 장애(2013.11.01)”

스스로 한계를 짓는 것이 장애

2013.11.1

아래 글은 조선일보 9월 13일자 주말 세션의 인터뷰 내용의 글을 퍼와서 좀 줄인 내용입니다.

 

<뇌성마비 언어·지체장애 딛고 조지메이슨 최고 교수까지 오른 정유선>

 

미국 조지메이슨대 특수교육과 정유선 교수는 뇌성마비로 말과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지만 한 학기에 세 과목을 가르치고‘최고 교수상’도 받았다. 얼마 전 서울 인사동에서 만난 정 교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국어 선생님이었던 신현숙 선생님의 편지(아래 작은 사진)가 삶을 바꾸었다고 말한다. 26 년 전 편지엔‘아무것도 겁내지 말고 너를 표현하여라’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위의 작은 사진은 정 교수가 이번에 서울을 방문했을 때 신현숙 선생님을 만나서 찍었다

정 교수는 뇌성마비로 인한 언어·지체 장애를 갖고 있다. 지능 자체엔 문제가 없지만 말이 어눌하고 이야기할 때 얼굴이 일그러지기 때문에 잘 모르는 사람은 지적 장애로 오해하기도 한다.

정 교수는 고등학교까지 서울에서 나온 후 1990년 미국으로 유학해 조지메이슨대(학사), 코넬대(석사)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 조지메이슨대에서 보조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2004년 교수가 됐다. 조지메이슨대는 학생 수 약 3만2000명의 공립대다. 그는 이 학교에서 학생들이 추천하고 교수들이 최종 심사를 하는 ‘최고 교수상’을 지난해 받았다.그는 유학 중 만난 미국 교포로 과학·정책 컨설팅회사에서 일하는 장석화씨와 결혼했고 똘똘한 남매 하빈(15)·예빈(11)이를 두고 있다. 사람들은 그의 삶에 간편하게 ‘인간 승리’라는 명패를 붙인다.

 

정 교수는 대학에서 강의할 때 AAC (Augmentative and Alternative Communication·보완 대체 의사소통기기)라는 보조 공학기구의 도움을 받는다.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치면 기계가 목소리를 대신 내는 방식이다.

정유선 교수가 뇌성마비라는 사실은 두 돌이 지나서야 밝혀졌다.

정확한 원인은 모른다. 갓난아이 때 앓았던 심한 황달 탓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딸이 뇌성마비 판정을 받자 가수로 활동하던 어머니 김희선씨(‘울릉도 트위스트’로 이름난 이시스터즈 전 멤버)는 딸 돌보기에 전념하기 위해 일을 그만두었다. 건설업을 하던 아버지 정현화씨는 고등학교 때까지 딸을 업고 다니며 헌신했다. 어린 시절 3년을 재활원에서 보낸 정교수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가 됐을 때 부모는 갈등하다가 일반학교를 선택했다. 어머니 김희선씨는 “언젠가 유선이가 우리 곁을 떠나 사회에 혼자 힘으로 우뚝 서야 할 날이 오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첫날부터 후회했다. 여덟 살 정유선은 자신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가 자기소개 해볼까”라고 물어보는 선생님, 손을 번쩍번쩍 들고 앞다퉈 교단에 나가는 아이들…. 박수와 웃음이 섞인 첫날의 교실에서 아이들은 모두 들떠 있었다. 정유선 학생도 손을 번쩍 들었다. 어머니 김희선씨는 “그때 나는 마음속으로 ‘안 돼!’라고 외쳤지만 막을 수가 없었다. 몇 번을 넘어지며 교단에 오른 유선이가 일그러진 얼굴로 자기소개를 하고 노래를 부르자 아이들이 배를 잡고 웃어댔고 결국 유선이는 엉엉 울었다”고 했다.

 

―학교에 입학한 후엔 어땠나요?

“거의 ‘발표 열외 학생’으로 지냈지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일이 기억에 남아요. 선생님이 칠판에 수식을 몇 개 쓰시더니 ‘이렇게 더해도 된다는 법칙은 뭐지’라고 물었어요. 저는 그냥 혼잣말처럼 ‘결합법칙’이라고 중얼거렸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그걸 들었는지 갑자기 ‘유선이가 일어나서 말해볼래’라고 하는 거예요. 저는 ‘그… 그…’ 하다가 그냥 앉았어요. 그때부터 주눅이 많이 들었고, 입을 더 다물었던 것 같아요.”

 

―선생님 때문에 상처 받는 일도 많았죠?

“저는 학기 첫날마다 선생님의 눈초리가 두려웠어요. ‘얘, 뭐야?’라는 그 눈빛이 큰 상처가 됐어요. 초등학교 때 매스게임 하잖아요. 그때 한 선생님이 저를 보면서 무심코 던진 말은 큰 상처로 남았어요. ‘아유, 큰일 났네’라는 말이었죠.”

 

―선생님이 좀 무심하셨네요.

1986년 봄 명성여고 1학년 국어 수업 시간. ‘결합법칙’ 사건 이후로 거의 7년 넘게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발언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워두고 있던 ‘열외 학생’ 정유선을 신 선생님이 불렀다. “유선이가 일어나서 시(詩)를 한번 읽어보자.” 정 교수는 “그날은 선생님이 작정했는지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고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저는 더듬더듬 시를 읽었어요. 시를 다 읽고 앉자마자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렸고 저는 그대로 책상에 엎드려 울었어요.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한 일을 해보게 돼서, 그런데 뜻대로 잘 안 되어서… 그래서 울었겠죠. 며칠이 지나자 제게 씌워져 있던 눈에 보이지 않는 ‘뚜껑’을 치워 주신 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고 그 마음을 담아 짧은 편지를 보냈지요.”

아래는 그 편지에 대해서 선생님이 보내 주신 답신의 내용입니다.

 

〈유선아, 새 학년을 기다리며 알찬 나날을 보내고 있겠지?… 나는 그 월요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책상 위에 놓인 편지에 온통 신경을 빼앗겨 버렸다. 솔직히 처음에는 두려운 마음에서 열어보기가 망설여졌다. 내 뜻밖의 행동에 대하여 유선이는 어떻게 느꼈을까? 너무 큰 충격을 받았거나 혹시 원망하고 있지 않을까?… 나는 내 교무 수첩을 들여다볼 때마다 유선이의 칸이 날짜가 없이 비워져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떤 때는 꿈도 꾸었다. ‘어, 유선이가 아직 한 번도 안 읽었네. 정유선 일어나요.’ 유선이는 서슴지 않고 일어나서 유창하게 읽었지. 수업 시간에 수첩을 들여다보다가 나도 모르게 유선이 이름을 부를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나는 그날까지 얼마나 생각하고 또 생각했는지 모른단다.

며칠을 두고 망설이다가 그날은 단단히 결심을 하고 수업을 들어가서 무심한 너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또 마음이 흔들려서 마지막 순간에 그냥 넘어갈 뻔하다 이렇게 우유부단한 나 자신에 대한 분노에서 힘을 내어 너의 이름을 부른 것이다. 네가 일어나서 한 자 한 자 정성 들여 읽어가는 동안 가슴이 방망이질을 하고 눈물이 솟아 넘치려는 것을 참느라고 애를 먹었다. 네가 혼자 힘으로 다 읽고 앉는 것을 보고 나는 칠판을 향하여 돌아서지 않을 수 없었단다. ‘잘 읽었어요’ 하는 소리도 못했지.

유선아. 나는 다만 너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다. 자신과 기쁨을 주고 싶었다. 아무것도 겁내지 말고 움츠러들지 말고 너를 표현하여라. 한 번에 안 되면 다시 하고 또다시 하고, 될 때까지 혼신을 다하여 끈기 있게 해보는 것이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게으름을 일으키고 게으름이 쌓이면 원망하는 마음이 생긴다… 특별히 누가 너를 생각한다거나 무관심하다거나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유선이에게는 오직 유선이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문제이지, 누가 유선이에게 어떻게 한다고 하여 거기에 마음이 끌려 다니지 않도록 해라… 부디 더 큰 기쁨을 경험하고 더 큰 감동을 만나기를 기원하며. 이만 안녕! 1987. 2. 27. 아차산 기슭에서 辛〉
신현숙 선생님의 당부는 이후 정 교수의 신조가 됐다. 그는 유학, 석·박사학위, 결혼, 강의 등에 악착같이 도전해 갔다. 도전한다고 다 이뤄졌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하지만 남이 어떻게 생각할까 두려워서, 혹은 남이 하지 말라고 해서 멈추지는 않았다. 할 수 있는 만큼은 무조건 열심히 해본 다음에 그만뒀다. 그러자 ‘체력장 만점’ 같은, 눈에 띄는 성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체력장에는 왜 그렇게 집착했나요?

“엄마도 선생님도 체력장은 그냥 기본 점수만 받자고 했어요.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해보다가 안 되면 모를까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를 한다는 게 용납이 안 됐어요. 밤마다 엄마를 졸라 윗몸일으키기를 했어요. 한 달 넘게 매일 운동장을 뛰면서 오래 달리기를 연습했어요. 다리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저는 수도 없이 넘어졌지만, 결국 체력장에서 만점을 받아냈죠.”

유학 초기인 1990년, 그가 수첩에 적은 말들은 당시의 암담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요즘 들어 나 정유선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고 있다. 죽고 싶다. 죽으면 아무 고통 안 받을 텐데’ ‘씁쓸함, 우울함, 허망감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왜긴 왜야? 내가 병신이니까 그렇지. 말도 못하고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병신이니까. 뭐 병신이 공부만 잘한다고 다 알아주나?’….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었죠?

“삶의 모든 일이 그렇듯이 비법은 없어요. 그냥 견디고 돌파하는 수밖에. 저는 신체 조건에 적합할 것 같아서 대학 때 컴퓨터공학을 선택했지만 ‘소프트웨어(software)’를 ‘물렁물렁한 도구’라고 번역할 정도로 컴퓨터에 문외한이었어요. 죽을 만큼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죠. 프로그래밍 숙제를 하려고 씻지도 않고 24시간 넘게 컴퓨터 앞에 붙어 있은 적도 많아요. 새벽 3시까지 공부하는 건 아주 일상적이었고 도서관이 문을 닫으면 학생회관 소파로 가서 밤새워 공부를 했죠. 그렇게 매달린 지 2년 만에 처음으로 다섯 과목 모두 A를 받았어요. 너무 좋아 길에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죠. 그때 누가 저를 봤으면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그는 책에 ‘장애가 없었다면 삶이 얼마나 밋밋했을까’라고 썼다. 장애가 있는 삶이 더 낫다고 여긴다는 듯 들렸는데, 믿기 어려웠다.

 

―선택할 수 있다면, 장애가 있는 삶을 고르겠다는 뜻인가요.

“나에게 언어장애가 없었다면 세상 사람들과 지금보다 훨씬 잘 어울려 지내지 않았을까 생각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장애가 만약에 없었더라면, 이만큼 열심히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 열심히 했고 그래서 이만큼 올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 과정에서 삶은 더 풍성해졌고요.”

인터뷰하는 내내 정 교수는 유쾌했고, 많이 웃었다. ‘유머 감각이 좋은 것 같다’고 하자 그는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을 인용했다. “‘천국에는 유머가 없다’고 하잖아요. 유머와 행복과 웃음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과 역경, 그리고 그걸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요.”

위의 글을 보고 너무 감동을 받게 되어 스크랩해 두었는데 오늘 문득 CEO Letter를 쓰려다 생각이 나 먼저 인용하게 되었습니다. 위의 인간 승리 스토리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은 크게 세 가지라고 생각이 됩니다.

첫째, 스스로 한계를 짓는 것이 장애이지 마음만 먹으면 그 한계를 넘어 새로운 삶을 얼마든지 개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 교수가 신현숙 선생님의 편지를 받기 전이나 받은 후나 뇌성마비로 언어와 행동의 신체적 장애 자체는 변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선생님의 사랑으로 마음을 열고, 가르침을 평생 간직한 채 혼신을 다하여 끈기 있게 노력해 온 결과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경지까지 오른 것입니다.

둘째, 부족할수록 더 노력하여야 하고, 그 노력이 성과를 맺기 위해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끈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으며 더욱 풍요로운 삶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장애를 갖고 있지만 정 교수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고,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교수로써 존경 받는 삶을 구가하고 있지 않습니까?

셋째, 전략적 선택이 중요하고, 이를 선택한 후에 집중함으로써 지속적 경쟁우위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장애가 있는 학생들이 공부하는 데는 많은 배려가 있는 사회이지만 교수가 되는 데는 장애가 있다고 더 배려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더 엄격한 역량 검증을 통과해야 가능한 것이고, 교수 임용 후에도 정 교수가 되기까지는 매우 힘든 과정을 이겨내야만 합니다.

정 교수가 본인의 신체 조건에 적합할 것이란 판단으로 컴퓨터 공학을 선택하여 석사까지 우수한 성적으로 마칠 수 있었고, 자신의 신체적 disadvantage를 극복하는데 더 적합한 전공인 보조공학으로 박사를 받는 길을 선택했기에 교수 임용 이후에도 지속적인 가치를 더 창출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즉, 다가 올 미래를 미리 내다 보고, 그것을 준비하는 사람한테는 더욱 큰 기회가 오게 되는 것이고, 아무 생각 없이 지내면 별 볼일 없게 되는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2,500 여 년 전에 공자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人無遠慮 必有近憂

?사람이 멀리 내다보며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운 데에 근심이 있게 된다-

이는 우리가 100년 기업이 되는 길을 생각해 보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神은 인간 모두에게 누구나 훌륭하게 될 수 있는 공평한 기회를 주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무사안일로 그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과 함께 오늘의 편지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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