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Letter] “성년이 된 永林院 에게(I)”

성년이 된 永林院 에게(I)

2013.5.1

 

바로 20년 전 오늘 永林院 네가 태어났지, 태어났을 때의 네 이름은 英林院(영재가 숲을 이룬다는 뜻)이었단다.  큐닉스데이타시스템(QDS) 소프트웨어 사업부의 핵심 인력들이 주축이 된 8명의 임직원들이 뜻을 모아 너와 함께 소프트웨어 패키지 비즈니스를 하겠다고 시작한 날이 오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는 근로자의 날이란 개념이 별로 없어 휴일도 아니었고, 창립을 축하하는 특별한 행사도 없이 그야말로 조촐하게 역삼동의 조그만 빌딩 5층에서 시작했었지.

 

1993년도가 바로 MS사에서 Window 3.1이 발표되면서 국내도 본격적으로 윈도우 시대로 접어드는 전환 시점이었다고 할 수 있지. 독일에서 박사 과정 3년 수료 후 우리한테 합류한 김영근 실장이 C언어로 윈도우 프로그래밍을 가르치고, 조환동 실장 이하 3명의 엔지니어가 열심히 배워서 『평생비서 오!K』란 개인정보용 패키지를 개발하기 시작했고, 경영관리실을 맡은 박경승 실장이 제작한 두꺼운 커다란 합판에 종이를 씌운 간이침구를 활용하면서 간간이  밤도 세우곤 했지.

 

너는 기억하느냐, 테스트를 맡았던 나도 사무실 한 구석에 자리 잡았던 내 책상 뒤에서 그 간이침구를 깔고 침낭 속에서 눈을 부치곤 했던 그 모습을….. 永林院, 너는 겨우 자본금 1억으로 8명이 신제품을 개발해서 먹고 살려고 하는 무모한 계획에서 시작했었지. 정말 하루하루가 매우 아쉽고도 귀중한 시간들이었지.

 

우선 팔 수 있는 제품부터 만들어야 했기에 바둑을 좋아해 윈도우용 기보관리 프로그램을 개발했던 김영근 실장이 원격지에서 서로 바둑을 두고 개가까지 할 수 있는 기능을 추가해서 『통신바둑 K2』란 국내 최초의 윈도우용 패키지를 개발해 11월부터 팔기 시작했지. 바둑 매니아들은 너무 좋아해서 첫 판 5,000부가 다 팔렸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일본에 가서 일본 프로기사와 한국에 있는 한국 프로기사 간에 국제 전화를 걸어 모뎀이란 통신장비를 이용해서 대전을 벌리는 이벤트도 추진했었지.

 

그런데 바로 그것이 추가 판매의 한계가 된 주요 요인이었지. 그 당시엔 인터넷이 없어서 한 시간 이상 두는 바둑을 두기 위해서는 전화를 통해서만 연결해야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전화를 못 쓰고, 3분당 부과되는 전화 요금이 만만치 않았기에 고수의 바둑 애호가 이외엔 그림의 떡에 불과한 제품이었지. 만약 그 때 인터넷이란 것이 있었다면 永林院은 지금쯤 세계적인 바둑 서비스 회사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모든 일이 그렇듯이 사업이란 것도 때가 맞아야 한다는 절실한 교훈을 얻게 되었단다.

 

그 해 12월까지 죽을 힘을 다해서 『평생비서 오!K』 개발을 끝내고 전자신문 주최의 소프트웨어 신상품 경시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던 것을 기억하는지. 실제 판매는 그 다음 해 1월부터 QDS에 있던 임승환 님이 책임을 맡아서 하게 되었고, 네가 가진 자금이 다 떨어져서 내가 모셨던 QDS 사장님을 찾아가 사정을 해서 선금을 먼저 받는 것으로 숨을 돌리게 되었고, 1억을 더 증자하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 다니며 통사정을 해서 겨우 자금 마련을 하게 되었지.

 

그런데 90년부터 매년 두 배로 성장해 오던 소프트웨어 패키지 유통 시장이 94년이 되면서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단다. 왜냐하면 소프트웨어 유통으로 많이 성장한 유통회사들이 욕심을 내면서 하드웨어 유통 중심으로 가면서 하드웨어 가격의 십분의 일도 안되는 소프트웨어 사업에 별로 관심을 안 두거나 심지어는 PC를 사면 공짜로 끼어주는 일들이 벌어지면서 돈을 주고 소프트웨어 산다는 개념들이 다시 깨지기 시작한 거지.

 

때 마침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면서 중소기업들한테도 5,000만원 씩 융자를 해 주게 정부 정책이 하달되었고, 은행에서 돈 빌린다는 생각도 못했던 나도 용기를 내서 기업은행 선릉 지점을 찾아가게 되었는데, 금융 거래 실적이 없다고 제삼자 보증을 서야 한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장인 어른을 찾아가 통사정을 해서 겨우 5,000만원 융자를 얻을 수 있었단다. 소프트웨어 시장은 점점 더 악화가 되면서 9명으로 불어난 식구들 비용은 더 커지면서 참 앞 길이 암담해지기 시작했다.

 

미리 환경 변화를 감지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참으로 고통스럽게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던 순간이었단다. 그 해 8월 초 직원들은 다 여름 휴가들을 가고, 우울하게 창가에 앉아 고민하고 있던 내 모습을 너는 기억하고 있느냐? ‘다음 달에 회사 문을 닫아야 하나, 그럼 빌린 돈 5,000만원은 어떻게 해야 하나, 안 되면 배추 장사라도 하지, 난 항상 열심히 살았으니까 배추 장사를 해도 잘 할 수 있을거야 …’ 등등 태어나서 처음으로 깊은 고민에 빠진 그 처량했던 내 모습을 말이다.

 

그런데 ‘예서 말 수는 없다’는 오기가 생기면서, 패키지 비즈니스만 고집하지 말고 살기 위해선 몸이라도 파는 SI 프로젝트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단다. ‘그래 내가 한국에선 최초로 IBM 대형컴퓨터에서 운영하던 경영정보 시스템을 클라이언트-서버 방식으로 다운사이징을 했던 PM이 아닌가’라는 생각으로 다운사이징 하겠다는 프로젝트들을 수소문해서 찾기 시작했다. 8월 말에 SK해운(당시 유공해운에서 다운사이징 프로젝트 추진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 가 보니 벌써 7 개 회사들이 제안 작업 중에 있었고, 부랴부랴 8번째로 제안에 참여하게 되었고, 다른 회사들은 실제 해 본 경험이 없었기에 SK해운 담당 임원과 전산팀장을 모시고 다운사이징 현장인 대한페인트 잉크로 방문한 이후 바로 우선협상자로 선정이 되었고, 제안한 금액 6억5천만 원을 한 푼도 안 깎고 계약이 이루어지게 되었단다. 네 자본금이 2억원이었는데 비하면 엄청난 금액이었던 셈이지.

 

 그야말로 기사회생의 순간이었고, 영림원 성장의 계기가 된 프로젝트였단다. 우선 시급했던 것이 사람을 뽑는 일이었고, QDS에서 데리고 있던 경력 사원들과 머리 수를 채우기 위해 홍기화 님을 비롯한 최초의 신입직원 3명을 뽑아 억지로 프로젝트 팀을 꾸릴 수 있었지. 모두가 열심히 해서 1 년 프로젝트 기간 이었는데 9개월 만에 쓰던  IBM 컴퓨터를 끊고(SK해운은 9개월 치 HW 유지보수비 약 1억 원 절감하고) 성공적으로 기한 내에 프로젝트를 마무리할 수 있었지.

 

한편 QDS에서는 『평생비서 오!K』의 업그레이드 버전을 자체에서 개발하기로 했다는 통보를 해 왔고, 이 시장을 뺏기면 소프트웨어 패키지 비즈니스로 성장하려는 꿈이 풍지박살 날 것이 두려워 주중에는 SK해운 PM으로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고, 주말에는 회사로 와서 『정보수첩 K』라는 『평생비서 오!K』를 이길 수 있는 신제품을 설계하고, 김영근 실장이 개발한 것을 테스트하고 하며 『평생비서 오!K』2.0 보다 두 달 먼저 출시할 수 있게 되어 개인정보관리 패키지 분야의 일등을 유지할 수 있었단다. 그런데 참으로 자랑스러웠던 것은 그 당시 그 분야에 세계적으로 일등 제품인 로터스社의 『오가나이저』란 패키지가 한국 시장에 들어와서 『정보수첩 K』와 그 다음 야심작인 『K 실록』에 밀려 별로 빛을 못 보게 했던 일이란다.

 

SK해운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향후 진로를 정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단다. SK해운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느낀 것은 이렇게 몸 파는 비즈니스는 SW 사업으로써의 메리트가 전혀 없다는 것을 재삼 확인했다는 것이다. 프로젝트 후 약간의 여유 돈도 생겨서 기업 업무용 SW를 패키지 비슷하게 만들어서 비즈니스를 할 수 있는 방안이 없을까 고민할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당시 SK해운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직원들을 불러 모아 놓고 ‘To be or Not to be?’ 하면서 패키지를 개발에 성공하면 살고, 실패하면 죽는데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를 물으며 패키지 개발의 길로 함께 가자고 다짐했지.

 

때 마침 디아이(당시 동일교역)의 전무로 있던 고등학교 동기가 보자는 연락이 왔다. 너도 잘 알다시피 이 친구는 지금 유명한 싸이의 삼촌이기도 하단다. 디아이의 MIS 시스템을 개발하는데 프로젝트가 잘 안되고 있어 나보고 해결해 줄 수 있느냐는 얘기였다. 그래서 솔직히 ‘내가 지금 MIS 패키지를 개발하려고 하는데, 그것을 개발해서 적용하는 방식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게 해주면 해보겠다’는 얘기를 했고, 그 친구가 흔쾌히 그러자고 해서 프로젝트가 계약이 되었다. 정확한 금액은 기억이 안 나나 약 3억이 조금 넘는 금액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약 7개월 정도의 패키지 개발의 기간을 얻어 보편적 기능- 여러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기능 중에 최대 공약수를 취하는 방식-을 중심으로 개발을 진행하였고, 그것을 적용하는데 예상보다 좀 오래 걸려 8개월 여가 소요되었단다. 이 시스템이 K.System 0.7 버전쯤 된다고 보면 된다. 생각해 보면 싸이의 삼촌인 친구가 없었다면 永林院의 ERP 비즈니스는 시작도 못했는지 모른다. 물론 그 당시엔 ERP란 단어 자체도 없었던 시절이었지만 말이다.

 

삶은 참으로 그리 간단치만 않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겠지. 혼자만 아무리 애써도 인연이나 환경이 받쳐주지 않으면 성공하기가 어렵고, 또 반대로 아무리 환경이나 배경이 좋아도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무언가 이루려는 의지가 없어도 성공은 어려운 일이기에 말이다. 여하튼 永林院이 ERP 비즈니스를 할 운명이어서인지 97년 초가 되니까 신문지상에 ERP란 것이 소개되기 시작했고, 우리가 만든 패키지가 ERP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패키지로서 70%의 완성품이었던 것을 100% 완성품으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거쳐 1997년 9월에 정식으로 K.System 1.0을 출시할 수 있었단다.

 

오늘은 여기서 그만 마치련다. ERP 출시까지의 永林院의 히스토리를 얘기를 1부로 하고, 나머지 얘기를 2부로 해서 들려 줄게. 한번에 다 하기엔 내게도 부담이 되고, 너무 길면 읽는 사람들한테도 지루해질 염려가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영림원 사람들한테는 그 뿌리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한 번 더 시간을 내어서 ERP 비즈니스를 하면서 엮였던 얘기들과 미래에 전개될 ERP 비지니스 양상에 대하여 정래 보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시간을 내보련다.

8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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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완석reply
2013. 05. 02 at 2:49 오후

와~
권영범님 그때의 사진인가요?
약간 촌스러우셨지만 ㅋㅋ 상당히 젊고 풋풋하셨습니다~

권선정reply
2013. 05. 02 at 2:57 오후

성년이 된 “영림원”

정순근reply
2013. 05. 02 at 3:02 오후

1993년…
CEO Letter를 받고 나는 그 해에 무엇을 했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생각해보니 나라의 부름을 받고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제대를 하는 해였네요..
개인적으로는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해야 되는 의무를 무사히 마쳤다는 뿌듯함과 학교로 복학하여 새로운 희망으로 가득찼던 한 해였던 것 같습니다.

성년이 된 永林院 에게 건강하고 무사히 잘 자라줘서 축하한단 말을 먼저 전하고 싶네요..
인간도 20살이 되려면 소위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으면서 인격도 형성되고 신체도 성장하는 과정에 많은 어려움과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성장하듯이 회사도 성년이 되는 과정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걸 압니다.
현재는 약관(若冠)의 어린 나이지만 앞으로 입지(立志), 불혹(不惑), …. 사람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성장하듯이 100년 기업으로서의 발전되는 나가는 永林院의 미래를 희망해봅니다.
다시 한번 성년이 된 영림원에게 축하의 말을 전하구요.. 영림원의 현재가 되기까지의 고난과 역경을 잘 극복할 수 있도록 해주신 아버지 권영범님과 가족 임직원분들에게도 축하의 말씀을 전합니다. 미약하나마 저도 조그마한 힘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임승환reply
2013. 05. 02 at 6:00 오후
– In reply to: 정순근

순근님,광진님 덕에 저도 용기를 내어~~

그때 정말 오!K Box 열심히 날랐습니다.
추운 겨울에도 용산에서 팔려나가는 [평생비서 오!K]를 보며 언손을 호호 불며 흐뭇해 하던 모습이 생생하네요.

이제는 모바일 [All in K]의 세련된 모습에서 예전 [평생비서 오!K] 의 드높았던 기세를 다시 느껴 봅니다.

그러다가 ERP K.System을 팔게 되었죠.

지금도 ERP K.system을 팔고 있지만 앞으로는 무엇을 팔게 될지? 변신 또 변신^^;;

지나간 시절 모두 아름답고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어 개인적으로 행복합니다.

앞으로 함께 영림원 식구들과 행복한 추억거리를 만들어 간다는 마음에 가슴 설레기도 하구요.

10년 후 우린 어떤 이야기를 서로 나누며 행복해 할까요?

모두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임승환 올림!!!

안광진reply
2013. 05. 02 at 3:04 오후

정순근님의 메일에 대해 용기를 내어…
권영범님에게만 보내 드렸던, ‘성년이 된 영림원에게’ 란 글귀에 대한 소회를, 감히 전사로 한 번 띄워 봅니다.

여러분~
사랑도, 애증도 표현입니다. 악플도 애증이 있어야 되는 것이고, 제일 무서운 것이 ‘무플’이라 하지 않습니까? ^^
정순근님처럼, 또는 저 처럼…

앞으로는 어떠한 행위에 대해서 마음 속 감흥을 혼자서만 느끼시지 마시고 표현을 해 보세요.
영림원이, 사회가 조금 더 따사로워 지고, 훈훈해 지지 않을까요?

안광진 Dream

박경승reply
2013. 05. 02 at 3:05 오후

벌써 20년 이군요 감회가 새롭습니다.

합판에 종이 붙였으면 딱딱해서 등이 배겨서 어떻게 했을까 질문 하시는 직원들이 있어서
합판아니고 건축 보온용 스티로폼(두께 10cm)을 청테이프로 표면을 감싸서 간이 침대로.. 가볍고 냉기 막아주고 좋습니다

김경욱reply
2013. 05. 02 at 3:06 오후

모처럼 제 직장생활을 회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원장님 Letter 중에서 반응이 가장 좋은 거 같은데요….맞나?ㅋㅋ)

그때 그 당시 제가 아주 많이 젊었을 때, 평생비서 오!K 1.0의 주 개발자 중의 한 명이었던 사람으로서 기억이 새삼스럽네요.
그 기억은 춥고 배고픈 겨울날 김이 모락 모락나는 따뜻한 호빵을 한 입 크게 베어 먹는 순간의 그런 추억입니다.
비록 영림원의 초기 멤버로 합류하지는 못했었지만, 또 다른 인연으로 지금 나름대로 역할을 하고 있는 점에서 뿌듯하기도 하고
초기 고생했던 멤버들에게 감사한 마음도 듭니다.

또 다른 20년이 오면 그때는 지금 CEO Letter를 읽고 계신 여러분들이 과거의 영림원을 회상하며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과거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지금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더 좋을 수 있도록 영림원이 행복한 직장, 위대한 기업로 성장할 수 있게 함께 해 봅시다.

감사합니다.
김경욱 드림

안광진reply
2013. 05. 02 at 5:18 오후

원장님…
안광진 입니다.

영림원의 20년 인생 중 1막을 보고서…
마음 속 어느 한 켠에서, 스멀 스멀 올라 오는 이 느낌은 무엇일까요?

원장님 이하, 창립 member 분들의 피땀어린 삶이 영림원 이란 녀석에게 녹아 있음을 부지불식간에 느낄 수 있었습니다.

20년 인생 중 2막의 한 귀퉁이에는 저도 조금 자리하고 있었지만,
과연 얼마나 영림원이란 녀석을 보살피고, 튼튼하게 자랄 수 있도록 영양분을 주었는지 자문해 봅니다.

이제, WBS로 시작될 인생 3막의 중심에는 저도 감히 함께 했노라고,
고희 (古稀) 가 되는 해에, 회고 할 수 있도록 청사진을 펼쳐보겠습니다.

성년이 된 영림원에게 1막1장 잘 읽었습니다.

안광진 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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