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4회 영림원CEO포럼] 동남아시아 입문: 신밧드는 왜 동남아로 갔을까?

복잡다단한 동남아시아를 이해하는 6개의 키워드

신일용 작가, 174회 영림원CEO포럼 강연

“동남아시아는 그 무궁한 잠재력에 비해 과소평가를 받고 있는 지역이다. 동남아시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몰이해 측면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 지역에 투자하는 정치적 및 경제적 노력도 여타 지역과의 포트폴리오 균형 측면에서도 현저히 부족한 상황이다. 경제인들이 우선적으로 동남아시아를 제대로 들여다보는 균형 잡힌 시각을 가져야 한다.”

삼성맨 출신 신일용 작가는 7일 174회 영림원CEO포럼에서 ‘동남아시아 입문: 신밧드는 왜 동남아로 갔을까?’ 주제의 강연에서 이렇게 밝혔다. 신 작가는 동남아시아를 이해하는 6개의 키워드로 △지정학 △다양성 △중국인 △식민지 △부패 △잠재력 등을 들어 복잡다단한 동남아시아의 어제와 오늘을 소개했다. 다음은 강연 내용

◆미국 성조기가 만들어진 사연 = = 동남아시아 11개국은 베트남,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필리핀, 인도네시아,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브루나이, 동티모르이다. 11개의 국가 중 10개국이 아세안이라는 지역기구에 가입돼 있으며, 아세안의 로고는 볏 짚단을 10개 묶어놓은 모양을 하고 있다. 동티모르가 아세안에서 빠져있는데 2002년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한 이후 아직 회원 자격을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 국가 중 말레이시아의 국기는 미국의 성조기를 본뜬 것처럼 보인다. 말레이시아가 1957년에 독립했으니 이렇게 생각할 만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미국 성조기의 붉은 색과 흰색의 줄무늬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깃발에서 디자인을 따왔다. 그리고 향신료 사업에서 돈을 벌려고 세웠던 영국 동인도회사의 깃발은 당시 향신료가 나오는 섬들을 온전히 지배했던 마자파히트(Majapahit) 제국의 깃발을 본떠서 만든 것이었다. 서방 중심의 글로벌 스탠더드의 허실을 엿볼 수 있는 한 대목이다.

복잡다단한 동남아시아를 이해하는 6개의 키워드가 있다. 바로 △지정학 △다양성 △중국인(화교) △식민지 경험 △부패 △잠재력이다.

◆동남아시아는 ‘세계의 교차로’ = 사람에게 사주팔자가 있다면 국가에도 타고난 운명이 있다. 그걸 지정학이라고 부른다. 동남아시아 지도를 보면 접시를 깨놓은 것처럼 복잡하다. 그래서 두 개의 지역으로 나누어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하나는 대륙에 연결돼 있는 ‘대륙지역(Mainland)’이며, 또 하나는 물로 싸인 섬들로 이뤄진 ‘도서지역(Archipelago)’이다.

동남아시아에는 “땅은 가로막고, 물은 연결한다”는 말이 있다. 대륙지역은 강을 중심으로 발전했으며 농업이 주류이며 불교 국가들이다. 도서지역은 해안선을 따라 발전했으며 무역이 융성했고, 필리핀을 제외하면 모두 이슬람교 국가들이다.

대륙지역의 산악 지대 사이에는 강줄기가 형성되어 평야를 적신다. 수많은 강이 있지만 가장 위대한 4개의 강은 미얀마 이라와디강, 태국 짜오프라야강, 베트남 메콩강, 홍강이다. 4개의 강의 공통점은 티벳고원에서 발원해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는 점이다.

동남아시아는 중국문명과 인도문명의 사이에서 양대 문명을 받아들였다. 서양인들이 이걸 보고 동남아시아를 편의상 인도차이나라고 불렀는데 다소 모욕적인 이름이다. 그럼에도 인도와 중국 사이에서 교류하고 발전한 동남아시아의 지정학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동남아시아의 도서지역은 아랍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 이유는 향신료 때문이었는데 이슬람교는 향신료의 무역로를 통해 동남아시아에 전파됐다. 신밧드가 동남아시아로 진출한 것도 향신료 때문이었을 것이다. 동남아시아에서 생산된 향신료는 복잡한 경로를 거쳐 최종적으로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로 운반됐으며, 베네치아는 유럽에서 향신료 보급의 에이전트 역할을 했다. 향신료는 동남아시아 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흐름을 바꿨다. 세계사를 움직인 5대 향신료 가운데 고추를 제외한 4개 향신료의 원산지가 모두 아시아 지역이다.

도서지역 동남아시아의 운명은 몬순기후에서 출발했다. 적도 부근 열대몬순은 계절마다 일정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제공하고 그 바람은 이방인들을 끌어들였다. 몬순이라는 말은 ‘계절’이라는 의미의 아랍어 모심(Mausim)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아랍의 뱃사람들은 계절마다 남동풍과 북서풍으로 방향을 바꾸는 동남아시아의 몬순바람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열대 몬순바람 덕분에 이미 근대 이전부터 동남아시아의 해안 도시들은 세계 각지의 상인들이 몰려드는 국제교역시장으로 발전했다.

포르투갈인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아프리카의 끝을 확인하고 이곳에 희망봉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드디어 아프리카의 남단을 동쪽으로 돌아 인도양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찾은 것이다. 1488년의 일이었다. 이어 바스코 다 가마는 희망봉 루트를 이용해 바닷길로만 인도에 이르는 항해를 최초로 성공했다.

동남아시아의 지정학적 위치의 키워드는 ‘세계의 교차로(Crossroad)’이다. 인도양을 건너 유럽으로, 중동, 인도, 중국, 그리고 태평양을 지나 미국까지, 전세계로 연결되는 교차로가 바로 동남아시아이다.

◆단일문화권의 사고방식으로 동남아시아를 이해해서는 안돼 = 동남아시아는 세계의 교차로로 언제나 열린 공간이었다, 바로 이 점이 동남아시아의 다양성을 낳은 요인이었다. 쇄국이란 것은 동아시아적인 개념이다. 오늘날 동남아시아에는 모든 외래문화의 요소가 소용돌이치고 있다. 그래서 우리 같은 단일문화권의 사고방식으로 동남아시아를 이해해서는 안된다.

동남아시아의 문화는 베트남을 제외하면 인도의 향기가 많이 난다. 힌두교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의 발리는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 유일한 힌두교의 섬이다. 싱가포르에는 수많은 인도네시아 여인들이 가정부로 일하고 있는데 발리 출신의 여인들이 인기가 높다. 그 이유는 돼지고기 요리를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는 힌두교 신전으로 짓기 시작했으나 건설 기간 중에 불교가 우세해져 완공 후에 불교 사원으로 바뀌었다. 앙코르와트는 세상을 보존하는 신인 비시누에게 바쳐진 힌두 사원으로, 비시누가 다스리는 힌두교의 이상향을 지상에 구현하려고 했다.

동남아시아의 전통적인 문자체계도 인도문명에서 비롯됐다. 세계 3대 문자는 알파벳, 음절문자, 그리고 이 두 중간의 아부기다(Abugida)이다. 동남아시아 문자 체계는 아부기다이며, 아부기다의 대표적인 문자가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이다.

힌두교의 설화에는 비시누가 타고 다니는 전설의 새인 가루다가 나오는데 그 발톱으로 움켜쥐고 있는 문장이 “다양성 속에서 하나 됨”이다. 인도네시아의 국시는 바로 “다양성 속에서 하나 됨”이다.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과거제도가 있었던 나라 베트남은 지역적으로는 동남아시아이지만 문화적으로는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 속한다. 아시아에서 유교의 영향을 받은 나라는 중국, 베트남, 한국, 일본이다. 조선은 유교가 뼛속까지 파고들어 그 폐해가 적지 않았지만 일본 도쿠가와 막부는 그러하지 않았다.

◆중국인의 100년간 대규모 이민이 동남아시아 역사 바꿔 = 인도문명이 동남아시아를 종교와 문자로 깨워놓았다면 중국은 이민자들로 동남아시아의 역사를 흔들었다.

중국 명나라 영락제는 환관 정화를 시켜 중국의 위대함을 세계에 알렸다. 정화는 신장이 230센티미터나 되는 기골이 장대한 인물로,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일곱 차례에 걸쳐 아라비아반도와 동부아프리카까지 국위 선양을 위한 순방을 했다.

정화의 함대가 어디를 가든 동남아시아는 반드시 거쳐야 했다. 세월이 흘러 원정대의 동남아시아 기지에 중국인 마을이 생기기 시작했다. 부킷치나(Bukit Cina)로 오늘날의 차이나타운이다. 이들은 현지 여인과 가정을 이루면서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요소가 혼합된 독특한 하이브리드 문화를 만들었는데 이를 프라나칸(Peranakan) 문화라고 한다. 프라나칸은 동남아시아 현지에서 아낙(anak)으로 태어난 중국인이라는 뜻으로 만들어진 말이다. 아낙은 아기라는 뜻이다. 프라나칸 남자는 바바, 여자는 노나라고 부르기 때문에 바바노냐(Babanonya) 문화라고도 한다.

동남아시아 근현대사 최대의 역동의 드라마를 만든 건 중국인들의 이민사이다. 19세기 청조말기의 중국은 두 차례의 아편전쟁, 태평천국의 난, 가뭄과 기근 등으로 비참했다. 당시 동남아시아를 점령하고 있던 유럽인들은 중국인들을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었다. 중국인의 동남아시아 이민은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절정을 이뤘다. 이 100년간의 대규모 이민이 동남아시아의 역사를 바꾸었다. 이들 대부분은 광산이나 플랜테이션 농장이나 항구에 일꾼으로 흡수됐다. 이른바 쿨리(Coolie)였다. 쿨리는 인도에서 온 말로 한자로는 ‘고력(苦力)’ 즉 고통스러운 노동자였다.

동남아시아로 건너온 중국인 이민의 99%는 중국남부 해안지방 출신이다. 해외로 이주한 중국인들의 동향조직을 방(幇)이라고 부른다. 동남아시아로 이주한 중국인들은 크게 5개의 방으로 나눈다. 복건방, 조주방, 광동방, 해남방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지역을 표시할 수 없는 방 즉 객가방(하카)이다.

객가(客家)방은 이름 그대로 손님처럼 나그네처럼 먼 길을 흘러흘러 동남아시아로 이주한 집단이다. 하카는 아주 오랜 세월 전 중국의 중원지역에서부터 유랑을 거듭하며 남쪽까지 떠내려 온 사람들이다. 천년의 유랑에도 자기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지켰다. 투러우(土樓)’라는 공동 주택을 지어 함께 생활했다. 억척스러운 생활력을 가지고 있고 군인과 정치가들을 많이 배출했다. 하카 출신의 대표적인 인물은 청말에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 홍슈취안, 싱가포르의 국부 대접을 받고 있는 리콴유다.

방이 중요한 것은 같은 방끼리만 말이 통했기 때문이다. 방은 동일한 언어와 문화의 그룹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방들은 자위를 위해 또 이권을 위해 폭력 조직을 키웠다.

영국 식민지정부는 프라나칸을 포함해 경제적 기반을 잡은 중국인들을 해협중국인(straits chiness)이라고 불렀다. 해협중국인은 영국 식민체제에서 상류층을 형성했다. 반면 해협중국인들과 대비되는 중국인들이 있었으니 자기 몸뚱아리 하나밖에 의지할 곳이 없는 이들이었다. 영국 식민정부는 이들을 이주중국인(immigrant chinese)으로 분류했다.

해협중국인들은 영어도 좀 하고 유럽인들의 지배체제를 인정해 그 안에서 경제적 기반을 잡은 중국인들이고, 이주중국인들은 자기 고향 사투리 외에는 한마디로 못하고 그날 벌어 그날 먹는 이제 막 동남아시아로 흘러들어온 중국인들이었다. 이주중국인의 생활은 거칠고 고달팠다. 대부분은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동남아시아에 남을 수 밖에 없었다. 오늘날 동남아시아 중국인들의 대부분은 그들의 후손이다.

중국 이민의 유산으로 동남아시아 어느 도시를 가든 ‘샵하우스(Shophouse)’라는 건물을 만날 수 있다. 이 건물들은 동남아시아 중국 상인들이 남긴 유적으로 1층은 가게, 2층은 살림집이나 창고로 쓰였다.

◆동남아의 식민지 경험, 오늘날 어떻게 나타나고 있나? = 1511년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풍요롭던 무역도시 몰라카가 포르투칼의 침공으로 함락된 해이며, 이후 400년간 이어질 유럽인에 의한 동남아시아 식민지화의 단초가 된 해였다.

유럽의 소국이었던 포르투갈이 동남아시아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교황이었던 알렉산더 6세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다툼을 해결하기 위해 지구를 반으로 갈라 두 나라가 진출할 지역을 정해주었고, 동남아시아는 포르투갈의 영역에 포함됐기 때문이다. 인위적으로 국경이나 관할권의 금을 긋는 ‘디마케이션(Demarcation)’ 정책이었다.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신흥해양국 영국에 참패를 당하면서 유럽의 중심이 남유럽에서 서유럽으로 넘어갔다. 포르투갈이 차지했던 동남아시아의 이권을 영국과 네덜란드가 비집고 들어왔다.

네덜란드는 17세기에 동남아시아 도서지역을 장악하고 향신료 무역 독점의 꿈을 이루고 당대 최고의 부국이 됐다. 네덜란드의 황금시대에 활약했던 빛과 어두움의 화가 렘브란트의 대표작 ‘야경순찰대’는 17세기 예술 방면에서도 네덜란드는 유럽 최고 수준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1653년 제주도로 표류한 하멜과 35명의 동료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직원들이었다.

영국은 미주 대륙과 인도에 집중하느라 동남아시아 해양도서 지역에서의 세력 확장에 소극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18세기가 가고 19세기가 다가오면서 미국이 독립하자 아시아가 상대적으로 중요해졌다. 또 하나는 중국 시장에서 팔아먹을 수 있는 새로운 상품으로 아편을 개발했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쳐 영국은 몰라카 해협을 접한 해안에 세계의 전략적 거점을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동남아시아 무역로의 숨통을 거머쥐게 된 것이다. 아편 무역 항로의 안전을 확보했고 주석 수출의 독점권을 쥐게 됐다.

영국 식민지 정부는 분할통치 또는 상호이간 및 견제 정책을 구사했다. 당시 말레이반도의 주요 도시에서 중국인 인구는 말레이 현지인들을 능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인 대신 인도 쿨리를 데려오려고 했다. 인도인들은 간단한 영어도 가능하고 영국 지배시스템에 익숙했다. 중국인 쿨리와는 달리 영국인이 직접 부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2차 세계 대전 후 영국이 나간 후에 말레이 반도의 인구는 현지인보다 중국인, 인도인이 더 많았다. 오로지 영국인들의 이익을 위해 중국인, 인도인들을 끌어들인 결과였다. 말레이반도의 이 인구비율은 20세기 후반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의 현대사에서 큰 소용돌이를 만들게 된다.

영국 식민정부는 ‘이이제이’와 같은 식민통치 전략을 폈다. ‘갈라쳐서 통치한다(Divide and rule)’는 게 그것이다. 분할통치의 상처를 가장 크게 입은 나라가 미얀마이다. 이 정책으로 미얀마의 소수민족 문제는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거치면서 더욱 악화됐으며, 오늘날에도 그 문제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영국의 식민정책에 따라 미얀마로 이주해온 소수민족 로힝야족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대표적이다. 또 말레이시아의 ‘부미푸테라(bumiputera)’는 현지민족인 말레이계를 우대하고 중국인을 견제하기 위해 만든 정책으로 이 또한 분할통치의 산물이다.

◆동남아시아 평균 연령 30세로 잠재력 무궁 = 필리핀 마르코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는 상상할 수 없는 부정축재 정치인들이었다. 국제투명성기구에서 매년 발표하는 부패 인식 지수에 따르면 싱가포르를 제외한 거의 모든 동남아시아 국가의 부패 지수 점수는 50점 미만이며 순위도 하위권에 랭크돼 있다.

싱가포르는 85점으로 4위에 올랐는데 싱가포르의 국부로 불리는 리콴유가 독재를 하면서도 부정부패가 없는 국가를 만들기 위해 펼쳤던 2가지 정책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 정책은 공무원에게 민간기업보다 높은 보수를 지급하고, 대신 부패를 저지르면 생매장시킨 것이었다.

반면 올해 필리핀 대통령 선거에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과 두테르테 현 대통령의 딸이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에 당선됐다는 사실은 필리핀의 현주소를 잘 보여준다.

동남아시아에는 현재 6억8천만의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평균 연령은 30세이다. 일본은 48.6세, 한국은 43.2세, 미국은 38.5세, 중국은 38.4세다. 인구 1억명에 육박하거나 넘는 나라는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3개국에 이른다.

노동가능인구가 피부양인구보다 많은 ‘인구통계학적 스윗 스팟(demographic sweet spot)’에서도 동남아시아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우수한 수치를 보이고 있으며, 앞으로 20~50년간 그 효과를 누릴 것으로 예상된다.

동남아시아는 전화기와 피처폰을 건너뛰고 바로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등 압축 성장을 하고 있다. 동남아시아의 젊은이들은 놀라운 디지털 적응력을 갖추고 있다. 앞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동남아시아로 취업하러 가는 게 보편화될 것이다.

우리는 중국과 일본에 너무 치우쳐 있는 현재의 포트폴리오를 이제부터 다양화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우리는 동남아시아를 더 잘 이해해야 하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더욱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박시현 기자> shpark@it-b.co.kr
영림원CEO포럼에서 강연된 내용은 아이티비즈 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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