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회 영림원CEO포럼] 역사의 종언, 그 이후

“‘탈 물질주의’와 ‘공동체 분열’이라는 문명의 갈림길에 선 우리의 선택은?”

김용학 전 연세대학교 총장, 164회 영림원CEO포럼 강연

 

김용학 전 연세대학교 총장이 1일 164회 영림원CEO포럼에서 ‘역사의 종언, 그 이후’를 주제로 강연했다. 김용학 전 총장은 이번 강연에서 현재 세계는 문명사적으로 거대한 두 가지 흐름, 즉 ‘공감 문명및 탈 물질주의’와 ‘공동체 분열’이라는 갈림길에 서 있다고 진단하고, 세계가 배려와 공감의 사회로 가도록 교육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해야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음은 강연내용

◆역사의 방황 = 지금까지 인류 지성사에서 가장 치열했던 논쟁은 사회주의 대 자본주의였다.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848년 발표한 ‘공산당선언’에서 전세계 노동자의 단결을 외치며 사회주의 체제의 건설을 역설했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1941년 펴낸 ‘자본의 순수 이론’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이 양 진영의 논쟁은 중국혁명,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냉전체제를 낳았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미국의 사회학자인 다니엘 벨은 ‘이데올로기 종언’이라는 저서에서 “상식 있는 사람들에게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무의미해졌다. 미래 정치는 조금씩 더 잘 적응하는 체계를 만드는 기술적인 일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니엘 벨의 이러한 주장은 1962년 당시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 27년이 흘러 1989년에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이라는 논문에서 “역사는 끝이 났다”고 천명해 큰 주목을 끌었다.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에 있었던 수많은 체제에 관한 실험들, 즉 봉견주의, 파시즘, 전체주의, 사회주의 등 각종 사회경제 체제의 실험이 멈추고, 모든 정치경제 체제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수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자유민주주의가 역사의 최종 승자로 결판났다는 담대한 주장이었다.

곧 ‘역사의 종언’을 지지하는 듯이 보이는 수많은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1년에는 소련이 해체됐으며, 사회주의와 시장을 결합한 중국 시장 사회주의가 발전하고, 왕정을 종식하고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아랍의 봄’ 등등의 사건은 ‘역사의 종언’을 지지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몇 년 후 아랍에서는 왕정이 복귀하고 군부독재가 다시 등장하고, 유럽에서는 극좌 또는 극우 정당이 난립하고, 미국과 영국 등 가장 발전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도 지유무역이라는 시장 질서에서 이탈하고, 민주주의는 투표율이 떨어지고 정치에 관심이 없는 이른바 ‘텅빈 민주주의’가 발전하며 다시 역사의 방황이 시작됐다.

◆공감 문명과 탈 물질주의 가치관 발전 vs 탈 진실사회 = 정치경제 체제가 방황하는 동안에 문명사적으로 거대한 흐름이 생겨났다. 조용한 혁명이 일어난 셈이다. 그 하나는 전 세계인의 탈 물질주의 가치관과 공감 문명이 발전했으며, 다른 하나는 정반대로 이른바 ‘탈 진실사회’, 즉 공동체를 해칠 정도의 여론 양극화 현상이 동시에 진행됐다.

문명 비평가로 잘 알려진 제러미 리프킨은 2009년 펴낸 ‘공감의 시대’라는 저서에서 세계는 경쟁의 시대를 넘어 공감의 시대로 들어섰다고 주장했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는 드라마 다모의 유명한 대사이다. 공감의 의미를 잘 드러냈다. 공감은 심리가 아니라 생리라는 이탈리아의 어느 과학자의 연구 결과는 흥미를 끈다. 공감의 능력은 배워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뇌 안에 있다는 것이 이 연구의 골자이다.

이탈리아의 이 과학자는 MRI를 통해 원숭이에게 먹을 것을 주면 특정 영역의 뇌세포(뉴런)가 활성화되는 것을 관찰했다. 그런데 먹을 것을 주지 않았는데도 옆에 있는 다른 원숭이가 먹는 것을 보고 그 뇌세포가 활성화되는 것을 발견했다. 이 뇌세포가 ‘거울 뉴런’이다. 주변의 행동과 정서를 자신의 행동과 정서로 거울처럼 반영한다고 해서 거울 뉴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결론적으로 공감은 심리가 아니라 생리적으로 연결되어 이뤄진다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공감 문명이 확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네트워크의 발전으로 멀리 떨어진 사람들끼리도 실시간으로 접속이 가능해지면서 나눔과 배려의 대상으로 편입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논의가 좀 부족한 편이지만 전 지구적 차원에서 인류의 삶은 앞으로 과연 지속 가능한가?라는 화두로 기후변화, 환경, 생태계 보호 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이스라엘 정부가 팔레스타인에게 코로나 19 백신을 공급한 사례는 인류 공동체 의식을 느끼기에 적합한 사례다.

지구촌 문제의 해결에는 어느 한 국가만이 아니라 전 세계 국가가 참여해야만 하며 그것이 지구 공동체 안에서 공감 문명을 확산하는 길이 될 것이다.

◆탈 물질주의 가치관이 만들어내는 세상 = 공감 문명과 더불어 탈 물질주의의 성장도 지금 세계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조용한 혁명이며, 이 혁명은 문명사적으로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탈 물질주의의 모습은 물질이나 돈에 휘둘리지 않는 삶의 질에 대한 고민, 남에 대한 배려, 사회의 소수자 존중, 공익적 결정에 참여하려는 욕구, 자기표현 욕구, 환경 및 지구적 문제에 대한 관심 증가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탈 물질주의의 흐름 속에서 윤리적 소비가 등장했다. 윤리적 소비는 소비자들이 시장에 에코 쇼핑백을 갖고 가거나, 제조사들이 상품의 포장을 플라스틱 대신 유리병으로 만들고, 일회용품을 배척하며, 아동 노동으로 만든 상품은 배척하며, 공정한 가격과 공정한 거래, 공정 경쟁, 그리고 탄소 배출량의 지표를 나타내는 탄소발자국 등이 그 구체적인 단면들이다. 조사에 따르면 1999년에서 2015년까지 영국에서 윤리적 소비는 꾸준히 증가했다.

지금 세계에서는 물질주의 관점에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적지 않게 벌어지고 있다. 그 중 하나가 ‘my climate’라는 조직의 활동이다. 지속 가능성 및 기후 보호 분야의 전문가로 구성된 이 곳에서는 사람들이 비행기를 탈 때 발생하는 탄소발생량을 계산해 비행기 표 가격에 그만큼 나무 심는 값을 더하고 이를 전 세계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기부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인간의 본성을 올바르게 발현하게 하는 것이 문명사적 숙제” = 자본주의 아버지 아담 스미스는 자본주의 교과서인 ‘국부론’에서 인간의 이기심이 자본주의의 기초라고 했다. 시장에서 각자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원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담 스미스는 또 하나의 저서 ‘도덕감정론’에서는 인간은 물질적 이익과 무관하게 아픔과 기쁨을 나누는 공감 능력을 갖고 있다고 했다. 모순된 얘기를 한 셈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은 무엇일까? 딱 부러지게 규정할 수 없다. 천사인지 아니면 악마인지 어떻게 발현되느냐 것이 문명사적인 숙제이다.

영화 타이타닉에서는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들이 어떻게 대처하는지 여러 모습을 보여준다. 자기 생존을 위해 돈으로 매수하는 ‘경제적 인간’, 질서를 위해 총으로 제압하면서도 스스로 죽는 ‘역할 수행자’, 종교적 심성으로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의 가치관을 공유하는 자들, 어린 애를 안고 있는 자애로운 어머니 등등.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때리거나 돈을 주거나 하면 될 것 같지만 그 사람의 가치관에 호소하는 것이 가장 강력한 힘일 듯싶다.

다중 자아 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내 안에 너무 많은 내가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자기 안에 여러 본성이 내재해 있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인터넷에 들어가면 돌변하는 모습이 그것이다.

자본주의에서는 합리적인 경제적인 행위인 효용 극대화를 추구한다. 그럼에도 사회적 가치를 무시하지는 않는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1명을 살리기 위해 8명의 정예 요원이 적진에 투입되어 벌어지는 얘기를 그렸다. 효용을 극대화 하지도 안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인간의 본성은 무엇일까라고 생각해본다.

여태까지 자본주의는 인간의 이기심과 합리성을 장려해 왔다. 하지만 최근 기업들은 사회적 가치 창출이라는 상징에 동참하고 있다. 기업들의 이러한 변화는 소비자들의 가치관 변화에 맞춘 것이다. 최근 기업들이 너도나도 강조하는 ‘ESG(Environment, Social, Governance, 환경 보호, 사회 공헌, 윤리 경영)’ 경영은 지금 한 때 유행이 아니며 문명사적 흐름이다. 기업이 재무적인 성과만이 아니라 ESG 활동에 적극 투자할수록 투자자들로부터 훨씬 더 높은 투자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또 다른 문명사적 전환 ‘탈 진실사회’ = 하지만 지금의 문명사적 전환이 긍정적으로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 문명사적 전환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탈 진실사회’이다.

사회를 분열시키는 두개의 알고리즘이 있다. 하나는 소셜 미디어 정보 추천 알고리즘이며, 또 하나는 뇌의 정보처리 알고리즘이다.

먼저 소셜 미디어 정보 추천 알고리즘은 내가 보던 종류만, 내 친구가 보던 정보만 추천한다. 그리고 뇌의 정보처리 알고리즘은 자신의 의견과 다른 내용은 금방 배척하며, 자신의 의견과 합치되지 않으면 커뮤니티를 옮기고 카톡방에서 빠져 나간다. 소셜 미디어의 추천 알고리즘은 문명사적인 질병으로 등장했다. 누에고치가 갇혀 사는 것처럼 한 곳에 갇혀있는 ‘정보고치’가 생겨난 것이 그 단적인 예다.

이 같은 흐름은 사회 결속 원리인 공동체 질서를 해치고 있다. 공동체의 균열 조짐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미국 상원의원 투표의 양극화 현상이나 미국 민주당, 공화당 유권자의 의견 양극화 경향은 이를 뒷받침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진보와 보수 사이트의 키워드 중첩도가 2~4%에 불과하다는 조사 결과는 양 진영이 서로 다른 언어(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지금 인터넷에는 수많은 정보가 넘쳐흐른다. 정보 생산자는 주목을 끌려고 자극적인 것에 집착한다. 사실과 관계없이 재미있는 얘기를 만드는 ‘이야기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 전쟁에서 네트워크 군대는 인터넷을 통해 연결된, 비슷한 성향을 지니며, 이해를 같이하며 행동하는 사람들과 단체들이다. 현실의 군대처럼 지휘관이 없다.

뇌의 정보처리 알고리즘은 자신이 믿고 있는 것만 받아들이고 감정과 배치되는 정보를 받아들이지 않는 확증 편향성을 굳히게 한다는 점에서 무서운 일이다. 우리 사회가 현재 양극화된 의견으로 집단 분열을 일으키는 단계에 접어들지 않았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교육의 중요성 = 미국의 교육학자인 W. E. B. 듀보이스는 “교육의 목적은 사람을 목수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목수를 사람으로 만든 것”이라며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여기서 말하는 목수는 전문인을 말한다. 각 분야의 전문가에게 가장 중요한 자산인 ‘지식’의 절반이 세상에서 쓸모없어지는데 걸리는 기간은 불과 7년이라고 한다.

인간성의 참 모습은 서로 배려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이는 참 교육으로부터 촉진될 것이며, 참 교육이 문명사적인 갈림길에서 인간이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박시현 기자> shpark@it-b.co.kr

영림원CEO포럼에서 강연된 내용은 아이티비즈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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