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에서 슬픔을 건져내다 – 시인의 서정 抒情 | 대외협력WG 김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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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림원소프트랩 대외협력WG에는 숨은 문인이 있다.

대외교육기획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김효선 님이다.

법무법인 세종 HR팀에서 근무하던 중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에 진학했고 석사 학업 완수를 위해 퇴사를 결심한다.

문학 석사를 마치고 영림원소프트랩 대외협력WG에 합류했고 그 해 겨울 <시와 사상>에서 문학 평론으로 등단한다.

현재는 주중에는 교육기획자로, 휴일에는 글쟁이로 창작을 병행 중이다.

 

앞으로 김효선 님의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시와 소설, 문학 평론의 세계로 여러분들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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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성 시집 『내 슬픔은 어디에 두고 내렸을까』

 

 

밤하늘에 깎다 버린 손톱처럼

칼날을 세우고 있다

어제 깎은 손톱이 거기까지 날아갔을까

 

– 서화성, 「초승달」

내가 한 편 시를 좋아하게 되는 순간은 시 속에서 시인의 세상이 구체적으로 그려질 때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인의 작은 세계 안에서 대상을 향한 시인의 투명한 호의好意나 천진난만함을 발견했을 때이다. 서화성의 세계 속에 초승달은 그가 전날 깎은 손톱이었다. 시인의 시선은 깎은 손톱의 유난히 뾰족하고 날렵한 가장자리에 머물렀다.

시 속에는 시인이 발견한 ‘대상’이 있다. 그것은 주로 시인 나름의 호기심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고, 시인의 순수한 시선과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려준다. 또한 시적 대상에 대한 시인의 시선은 그 나름의 선별과 의지에서 나왔을 것이므로, 궁극적으로 시적 대상을 통해 독자는 시인의 성향, 나아가 그의 성품을 그려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늘 ‘대상’과 그에 대한 시인의 마음가짐을 연결해보는 편이다. 때때로 이러한 시 읽기는 시인의 개별적 삶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이 찢어지게 그리운 밤이 지나면

빗소리가 그치겠지

아직도

어느 소도시의 이발소 삼색등이 돌고 있다

서화성, 「서화성씨, 뭐 하세요」

시인은 아주 여리고 섬세한 감성을 가진 자들이다. 특히 서정 시인들이 그렇다. 시인이면 시인이지, ‘서정’ 시인이 따로 있느냐고,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냐고 묻는다면 그 질문은 ‘서정시란 무엇인가’라는 거대하고 난해한 질문으로 이어지는 일이어서 당황스럽다. 하지만 사실 그 질문에 대해서라면 명쾌한 답이 없다. ‘한국 현대 서정’이다, ‘서양 서정시론’이다, 학자와 비평가들이 이러쿵 저러쿵 해놓은 이력이 많지만, 복잡한 말들만 수두룩할 뿐, 정확하게 콕 집어 떨어지면서 모두의 공감을 살 만한 명제도 없는 듯하다. 

사실 내가 보기에 세상의 모든 시인은 서정 시인이다. 그 이유는 시인 중에서 서정시 써보지 않은 시인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본래 정치시를 쓰든, 목가시를 쓰든, 시 속에 거대한 서사를 부여하든, 심오한 철학을 부여해서 시적 대상을 이리 볶고 저리 볶든 간에, 시인치고 시 속에 ‘가장 개별적인 정서가 깃든 내밀한 서정’을 적지 않은 자는 없을 것이다. 인생에서 자신이 목도(目睹)한 가장 아름다웠던 풍경에 대해, 돌이킬 수 없는 유년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의 감정에 대해, 이유도 알 수 없이 고통스러웠던 사랑과 애인에 대해 쓰지 않은 시인은 없을 것이다. 그 참을 수 없는, 폭발할 듯 안에서 휘몰아치는 감정들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으므로 시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시인의 운명이다. 

M. H. 에이브럼스가 『문학비평 용어사전』에서 말했듯이, “서정시는 상당히 짧고 비-서사적인 시로 한 명의 화자가 나타나며 이 때의 화자는 마음의 상태나 사상과 감정의 과정을 표현한다” . 이처럼 서정시에서 화자는 주로 자신의 개별적인 시선과 감정에 몰두하는 편이다. 

서화성의 시집 『내 슬픔은 어디에 두고 내렸을까』에는 다양한 시편들에서 시인의 몰입된 감정을 드러낸다. 그의 시는 무엇보다도 유년의 기억을 통해 가족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를 표시한다는 면(「홍시」, 「김장」)에서, 두 번째로는 도심 아닌 포구 혹은 해안 변두리에서의 소박한 풍경을 드러낸다는 면(「가족 3」, 「내 님」, 「고민」, 「다대포 연가」, 「그곳, 계림에 가면」)에서, 세 번째로는 노래하듯 반복되는 짧은 어구를 반복하여 리듬과 운율을 살리고 있다는 점(「시인이라서」, 「슬픈 일」, 「그랬으면 좋겠네」, 「이름이 있습니다」, 「내일」, 「그런 사이」)에서, 마지막으로는 대부분의 시적 정서가 깊은 외로움 혹은 슬픔으로 귀결되고 있다는 면(「혼자」, 「서화성씨, 뭐 하세요」, 「변방에게」, 「낮잠」, 「오늘이 슬퍼요」에서 서정시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서화성의 시상(詩想)은 주로 유년의 기억에서 비롯된다. 「홍시」에서 그가 기억한 것은 어머니의 젖가슴이다(‘말랑말랑한 홍시를 만지면 내 엄마의 젖무덤 같아서’). 홍시의 촉감은 기억의 매개가 되어 그를 어린 시절로 되돌려 놓는다. 또한, 「김장」에서 끓는 시래기와 수육을 바라보며 시인이 떠올린 것은 작은 누이이다. 그는 작은 누이의 추위 타던 발과 시린 손등을 생각한다. 어린 소년의 모습에 스스로 이입하다가 현재의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허탈감에 빠진다. 그러므로 시인이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장소는 언제나 ‘눈물의 정류장(「가족 3」)’이다. 그는 어린 시절을 회고하면서 ‘그립구나, 눈물겹구나’, 탄식한다(「홍시」). 이처럼 대부분의 시편은 이제는 달라져 버린 현재의 상태에 대한 고독과 회한의 감정으로 귀결된다. 

시인이 슬픔을 토로하는 사례는 더러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비가(elegey)라 불리던 양식이 독일 서정시인들에게 답습되어 괴테가 「로마 비가」를 부르기도, 조금 더 시간이 흘러 20세기에는 릴케가 「두에노의 비가」를 읊었다. 윤동주가「서시」에서 드러낸 부끄러움도, 김소월이 「진달래 꽃」에서 노래한 한(恨)의 정서도, 슬픔을 가슴에 묻은 자들의 무력함과 비애의 정서가 고스란히 드러낸 예시이다. 

슬픔의 서정은 시인의 숙명이다. 시인이 슬프지 않았으면 하는 순진한 소망은 그에게 시를 쓰게 한 원동(原動)을 부정하는 것이므로 아이러니이다. 그러나 박윤우가 『서정시와 대화적 상상력』에서 말했듯이 “이 시대의 서정시는 겉으로 너무나 평온한 가운데 내부적으로 크나큰 변혁의 소용돌이 속을 헤엄쳐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의 한국 현대 서정시는 이대로 괜찮은 것인지에 대한 우려 섞인 담론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던 것은 사실이다. 

서정시는 항상 현실적 주체가 그 자신만이 그려내고 꿈꾸는 서정적 정서를 순연하게 표출해내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 왔다. 그러기에 언어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동경의 언어로 가득 차 있었고, 또는 이루어져야 할 것에 대한 의지의 언어로 뒤덮여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종의 믿음이 가능했던 것은 대상의 주체적 내면화를 통한 자기 동일성의 확보라는 서정시 고유의 본질을 구현할 수 있는 인식의 저변이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던 현실적 토대가 존재했던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대상의 주체적 내면화를 통한 자기 동일성의 확보라는 서정시 고유의 본질을 구현할 수 있는 인식의 저변” , 즉, ‘시인의 마음 깊숙한 보루에 간직한 가장 고유한 내면의 서정’은 언제나 문학을 읽는 사람들에게 현실의 체험을 넘어서는 깊은 위로와 공감의 축이 되어 가슴 속에 오래 남는다. 그것은 ‘동경의 언어’를 구현해내기 위한 절제된 ‘의지의 언어’로 단단하게 쌓아 올려져야 할 것이다. 앞으로 서화성의 고유한 언어로 창조될 단단한 위로의 서정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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