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인사이트] AI 최종 승부처…누가 복잡계를 장악하는가


AI 최종 승부처…누가 복잡계를 장악하는가

 

콘텐츠실장 안경애

 

2026년 초 소프트웨어 산업은 거대한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 지난 20년간 성장해온 범용 SaaS(서비스형 소프트웨어) 모델의 위기를 점치는 ‘사스포칼립스(SaaSpocalypse)’가 현실화되었다.

AI가 해내는 일은 갈수록 늘어난다. MS 워드 문서나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만들기 위해 M365를 열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 AI는 단순한 도구를 넘어 업무용 솔루션 그 자체이자, 여러 시스템을 조율하는 컨트롤타워로 진화하며 소프트웨어 영토의 중심부와 접근 통로를 동시에 파고들고 있다.

 

복잡계로 향하는 벤처투자

이 가운데 미국 벤처캐피털 유클리드 벤처스가 내놓은 ‘2026년 버티컬 리포트’는 최근 자본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보고서는 2025년 한 해 동안 미국과 캐나다에서 일어난 소프트웨어·AI 벤처투자와 엑시트 사례를 분석한 결과다.

 

 

2025년 고성장 카테고리 내 신규 투자에서 범용 SaaS의 비중은 9%로 급락한 반면, 특정 산업에 특화된 버티컬 AI는 28%로 치솟았다. 미래 성장에 베팅하는 벤처 투자의 신규 자금이 버티컬 AI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

순유지율(NRR) 지표도 이 흐름을 뒷받침한다. NRR은 기존 고객으로부터 1년 후 얼마나 많은 매출을 유지하는지를 백분율로 나타낸 지표다. 버티컬 AI의 평균 NRR은 124%로, 범용 SaaS(102%)를 압도한다.

이런 흐름은 산업 현장의 복잡계를 이해하는 기술기업의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범용 AI가 번번히 시범사업 수준에서 실패를 겪을 때 성공적인 기업들은 달랐다. 답은 하나다. 산업 현장에서 쌓은 문제 해결 경험, 고객 데이터, 업무 프로세스 지식 위에 AI를 올리는 것. 바로 버티컬 AI다.

 

보험산업의 복잡계를 파고든 에볼루션IQ

보험 청구 처리 분야의 에볼루션IQ(EvolutionIQ)는 담당자를 대체하는 대신 그들의 역량을 극대화하는 ‘지렛대’ 역할을 택했다. 의료 기록과 법률 문서 등 범용 AI가 이해하기 힘든 비정형 데이터를 구조화하여 위험 점수를 산출했다. 보험사는 담당자가 몇 퍼센트만 더 정확하게 판단해도 보험사에는 수억 달러의 이익이 돌아간다. 이들은 기존 핵심 시스템을 교체하지 않고 그 위에 얹히는 방식을 택해 통합의 난관을 피하며 지난해 7억 5,000만 달러 규모의 엑시트를 달성했다.

 

건설 생태계에서 통한 다차방정식

건설 산업은 버티컬 AI의 가장 험난한 개척지로 꼽힌다. 소유주, 시공사, 하청업체, 금융사가 얽힌 복잡한 이해관계 구조 때문이다.

빌드비전은 다차방정식으로 이 문제를 풀었다. 생태계 내 모든 참여자에게 필수적인 소프트웨어를 무료로 배포해 시장을 장악한 뒤 플랫폼에서 이뤄지는 거래와 절감된 비용에서 수익을 얻는 구조를 만들었다.

프로코어와 레벨셋 간의 5억 달러 규모 M&A 거래도 주목할 만하다. 프로코어는 건설산업 특화 SaaS 기업으로, 발주자, 종합건설사, 전문건설사, 하도급사를 연결해 착공 전 단계부터 준공까지 종합 지원하는 플랫폼을 갖췄다. 그러나 대금 결제, 유치권 서류 같은 일부 기능이 취약했다. 레벨셋은 그 틈새에서 전문성을 쌓은 회사다. 이번 M&A는 버티컬 AI 스타트업의 출구 전략에 시사점을 준다. 독자 생존도 길이지만 산업 생태계 내에 이미 자리잡은 플랫폼에 핵심 모듈이 되는 것도 성공적인 전략이다.

 

워크플로우 안에 핀테크를 심은 ‘서비스타이탄’

현장서비스 분야의 서비스타이탄은 ‘버티컬 AI + 버티컬 핀테크’ 대표 주자다. 이 회사는 결제와 대출 기능을 워크플로우 안에 직접 통합했다. 핵심은 자금 흐름 통제다. 고객이 서비스를 요청하고, 기술자가 현장에서 작업하고, 대금이 결제되는 전 과정이 하나의 플랫폼 안에서 돌아간다. 이들은 구독료 외에도 거래 기반의 수수료를 취함으로써 새로운 수익 모델을 확보했다. 리포트에서 강조하는 ‘디스패처 문제’, 즉 자원 배분과 최종 결정권을 쥔 주체가 가치를 독점한다는 원리를 파고든 사례다.

 

영림원, 30여 년간 갈고닦은 ‘화이트박스’의 가치

 

이러한 논리는 ERP 시장에서도 확인된다. 33년 역사의 영림원소프트랩은 ‘메타데이터 기반 개발’이라는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메타데이터 방식은 프로그램 구성 요소와 관계를 코드가 아닌 데이터로 정의한다. 화면 구조, 서비스 호출 관계, 데이터 조회 방식이 모두 명시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인 코드 시스템은 AI에게 ‘블랙박스’지만 관계가 이미 구조화된 메타데이터 시스템은 즉시 읽어낼 수 있는 ‘화이트박스’다.

현재 추진 중인 차세대 개발 플랫폼 프로젝트는 이 자산을 극대화하는 작업이다. 30년간 축적된 수만 개의 화면과 테이블, 비즈니스 규칙을 벡터 DB와 결합하여 AI가 구조적으로 유사한 로직을 즉시 찾아내게 한다.

에볼루션IQ가 보험 청구의 복잡성을 구조화하고 빌드비전이 건설 생태계의 복잡성을 풀어냈듯이 영림원은 산업 현장과 공공 분야의 ERP 맥락을 30여 년간 축적해왔다. 수천 개 고객사의 커스터마이징 이력 자체가 범용 AI가 따라올 수 없는 ‘해자’다.

 

‘축적의 시간’이 가져다주는 열매

‘가속 혁신’의 시대에 레거시는 흔히 걸림돌로 취급된다. 그러나 사스포칼립스는 레거시의 가치를 재조명했다. 에볼루션IQ부터 영림원소프트랩에 이르기까지, 이들 기업의 공통점은 복잡한 현장의 문제와 답을 오랜 기간 구조화해 왔다는 것이다.

AI 시대에 진정한 해자는 산업 현장의 복잡성을 이해하고, 그 이해를 데이터로 축적하고, 고객과 함께 문제를 풀어온 ‘축적의 시간’이다. 경제성과 효율성을 앞세운 단순 기능형 소프트웨어는 도태되고, 산업의 복잡계를 끌어안으면서 작동방식을 재설계하는 기업은 승리할 것이다. 바야흐로 버티컬의 역습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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