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인사이트] 사스포칼립스의 경고…’우문현답’은 진리였다


사스포칼립스의 경고… ‘우문현답’은 진리였다

 

콘텐츠실장 안경애

 

‘우문현답(愚問賢答)’의 뜻은 ‘어리석은 질문에 현명하게 대답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인공지능(AI)과 엔터프라이즈 소프트웨어 업계에서는 다른 의미로 읽힌다.
‘우리의 문제에 대한 답은 현장에 있다’는 것이다.

공공기관장이나 기업 CEO가 취임사에서 쓸 법한 이 표현이 요즘 더 피부에 와닿는 것은 AI의 진화가 소프트웨어 산업에 던진 근본적인 질문 때문이다. AI가 코드를 짜고 직접 일을 실행하는 시대에 소프트웨어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사스포칼립스의 습격

최근 글로벌 시장에는 ‘사스포칼립스(SaaS-pocalypse)’ 공포가 퍼지고 있다. SaaS(서비스형 소프트웨어)와 아포칼립스(종말)의 합성어인 이 말은, AI 에이전트가 발달하면서 기존의 기업용 소프트웨어들이 설 자리를 잃을 것이라는 우려를 담고 있다.

발단은 올초 공개된 앤스로픽의 AI 에이전트 ‘클로드 코워크’였다. AI가 스스로 복잡한 업무를 수행하고 파일 정리나 스프레드시트 생성을 완벽히 해내자, 세일즈포스, 어도비 같은 기업의 주가가 크게 흔들렸다. 법률·금융·마케팅에 특화된 확장 도구까지 추가되자 시장의 공포는 더 커졌다. 톰슨로이터 주가가 급락하는 등 다른 산업으로도 파장이 튀었다.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AI가 전통 구독형 업무용 소프트웨어를 대체하기 시작했다”고 진단했다.

이후 질문이 한 단계 더 나아갔다. AI 시대에 어떤 소프트웨어가 살아남고 산업을 주도할 것인가?

 

다시 확인된 ‘현장의 가치’

이 가운데 숫자로 가치를 증명하는 기업이 있다. 팔란티어다. 2025년 4분기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70% 증가했고 조정 영업이익률은 57%를 기록했다.

팔란티어의 비즈니스 모델은 SaaS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현장 배치 엔지니어(FDE)’가 고객사에 직접 들어가 데이터를 수집·분류하고, AI가 즉각적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한다. ‘부트캠프’라는 과정을 통해 5일 내에 데이터 수집부터 데모 구현까지 완료한다. ‘온톨로지’라는 방법론을 이용해 고객의 데이터 간 관계를 정의하고 구조화하는 것이다.

구독형 SaaS는 AI가 사용자를 대체하면 구독료가 줄고 매출이 타격을 입지만 장기 계약 위주의 팔란티어 같은 모델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다.

오픈AI, 앤스로픽 같은 AI 기업들도 수백 명의 AI 기술 컨설턴트와 FDE를 고용하며 현장으로 달려가고 있다. 어도비와 세일즈포스 같은 전통적 SaaS 기업들도 2025년 말부터 FDE 채용에 나서고 전담 팀을 공식화했다.

결국 AI 시대의 진정한 파워는 ‘고객의 현장’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쉽게 만든 것은 쉽게 사라진다

사스포칼립스가 주는 시사점은 AI 시대에 진짜 가치 있는 소프트웨어와 쉽게 만든 소프트웨어에 대해 철저한 차별화가 이뤄진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AI가 대체하기 어려운 소프트웨어는 무엇인가?

수천 개의 테이블과 비즈니스 규칙이 실타래처럼 얽힌 엔터프라이즈 솔루션은 AI에게도 거대한 블랙박스다. 복잡한 산업 현장의 맥락을 담지 못한 AI는 겉모양만 흉내 낼 뿐 현장의 복잡성을 소화하지 못한다. 수십년간 고객과 함께 주어진 문제를 풀면서 현장을 지킨 시간 자체가 해자(moat)가 되는 것이다.

 

시간이 만든 해자

현장에서 땀 흘린 시간이 해자가 된다는 것은 이미 글로벌 시장에서 증명되고 있다.

미국의 에피코어(Epicor)는 50년 넘는 역사의 제조·유통 특화 ERP 기업이다. SAP나 오라클처럼 모든 산업을 포괄하는 대신 ‘make, move, sell(만들고, 옮기고, 파는)’ 산업에 집중하는 전략이 AI 시대에 빛을 발하고 있다. 이 회사는 지난해 ‘지능형 ERP’를 선언하며 산업별 전문 AI 에이전트 적용사례들을 공개했다. 50년간 제조·유통 현장에서 쌓은 산업 데이터 구조 위에 AI를 올린 것이다. CEO 스티브 머피는 “AI는 맥락 속에서 적용될 때만 가치가 있다”며 범용 AI와의 차별점을 강조했다.

스웨덴에서 출발한 IFS는 40년 넘게 항공·방위·에너지·제조 등 자산 집약적 산업의 현장 서비스에 특화해온 기업이다. 60만 명의 현장 기술자 스케줄링을 AI가 매일 처리하는데, 기술자의 전문 역량, 고객 상황, 자산 상태, 이동 경로, 교통 상황, 차량 종류까지 고려한다. 이 최적화 엔진은 40년간 축적된 산업 현장 데이터 위에서 작동한다. CEO 마크 모팻은 “범용 AI가 실패하는 곳에서 목적 특화형 AI가 성과를 낸다”고 말한다.

국내에서 33년간 중소·중견기업 ERP 시장을 지켜온 영림원소프트랩은 2700여 개 고객사 현장에서 쌓아온 업무 맥락을 AI의 기반으로 삼고 있다. 영림원은 솔루션을 파는 데 그치지 않고, 제조업의 생산 흐름부터 유통업의 복잡한 발주 체계까지 고객사마다 다른 ‘경영의 족보’를 시스템에 담기 위해 수만 개의 비즈니스 규칙을 구조화해 왔다. 30년 넘게 포기하지 않고 구조화해 온 이 ‘복잡성’은 AI 시대에 따라잡기 힘든 경쟁 우위가 되었다.

 

진짜의 가치가 더 커진다

사스포칼립스는 소프트웨어의 종말이 아니다. 쉽게 만든 소프트웨어의 종말이다.

수많은 대가와 비용을 치러가면서 포기하지 않고 현장의 복잡성을 껴안고 구조화해온 기업의 진가가 드러나는 시대가 왔다. 고객의 일을 고객만큼 알고, 고객으로부터 배우며 문제를 함께 풀어온 시간. 그 시간의 축적이 AI라는 가장 현대적인 엔진을 만나 날개를 달고 있다.

우리의 문제에 대한 답은 역시 현장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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