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쓰는 글 | Chapter 5 | 주란 대로 주께

Bach·Sheep May Safely Graze BWV.208, No.9

words & design·고객가치마케팅 오지연

음악이 쓰는 글 | Chapter 5 | 주란 대로 주께

Bach Sheep May Safely Graze BWV.208, No.9

12년 전 여름에 순천만이란 곳이 궁금해서 혼자 순천으로 떠났다.

여행은 끝내줬다. 세찬 비가 내려 아무도 없는 순천만에서 혼자 소리 내어 웃으며 뛰어다니고 홀딱 젖은 채로 바들바들 떨며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었다.

동네 분들께 기웃기웃 말도 붙여 보고 이른 아침 선암사를 오르는 길엔 공기가 너무 맑아서 다 내뱉지도 않은 숨을 연거푸 들이쉬다 코가 매워지기도 했다.

산길을 구불구불 지나는 버스 기사 아저씨들은 주민들의 일과를 훤히 꿰고 있었고 ‘어제는 왜 안 나왔는지’, ‘오늘은 또 뭘 샀는지’… 서로 아는 것도 궁금한 것도 많은 정다운 그들은 어리숙한 외지인에게도 꼭 그렇게 다정했다.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던 여행의 막바지, 어느 작고 한산한 시장에 들러서 생선이며 대자리 같은 것들을 구경하다 과일 노점 앞에 섰다. 주변에 사람도 가격표도 없고 과일만 잔뜩 있어서 냄새나 맡고 가야지 하던 차, 주인 할머니가 어디서 순식간에 나타나셔서는 “아가씨 뭐? 주란대로 주께!” 하셨다. 헉.

“아가씨 뭐? 주란대로 주께!”

어디서 나타나셨지, 순간이동인가, 그리고 ‘주란 대로 주께’가 무슨 말씀이신지, 당황해서 “앗, 괜찮아요” 하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돌아섰다.

이쯤 되면 이 아름다운 고장에 동화되지 않았나 하는 기분에 취해 있던 무렵 할머니의 기습에 당황하고 만 나는, 준비된 점원과 깔끔한 메뉴판 그리고 “주문하시겠어요?” 또는 “결제하시겠어요?”가 더 익숙한, 어쩔 수 없는 ‘서울 아’였다.

J.S.Bach Sheep May Safely Graze BWV.208, No.9

길을 따라 나오면서 할머니를 따라 되뇌었다.

‘주란 대로 준다’니, 곱씹어 볼수록 재밌고 따뜻했다.

익숙해져 있는 재미없는 것들보다 훨씬 익숙해지고 싶은 말이었다.

뒤로 돌아 다시 걸었다.

금세 돌아온 나를 아무렇지 않게 맞으시며 ‘서울 가는 기차에서 혼자 먹을 것’이란 말에 ‘좋을 대로 담으라’ 하시더니, 골라 담은 복숭아 자두 몇 개에 마음대로 매기신 가격 이천 원.

기차역 화장실에서 잘 씻은 복숭아를 서울행 좌석에 앉자마자 베어 물었다.

울퉁불퉁 못생긴 게 별 맛도 없었는데 웃음이 나왔다.

기차가 출발하기도 전에, 벌써 순천이 그리워졌다.

🎧

Performed by Yeol Eum Son

AI로 생성한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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