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인사이트] 왜 더 어려운 길을 택한 기업들이 AI시대의 승자가 되는가

왜 더 어려운 길을 택한 기업들이 AI시대의 승자가 되는가

고객 옆을 고집스럽게 지킨 기업에 주어진 보상

 

콘텐츠실장 안경애

 


 

지난 10여 년간 B2B 소프트웨어 시장을 지배한 공식이 있다. 클라우드 기반의 구독 모델이다.

이 모델의 장점은 분명하다. 개발과 유지보수 비용이 줄고 마진은 높아지며 글로벌 확장도 빨라진다. 기술기업들은 고객 현장의 복잡한 요구사항에서 벗어나 수익성과 확장성을 동시에 잡았다. 수요 기업도 기술을 비교적 싸고 쉽게 쓸 수 있었다.

이 방식은 B2B 소프트웨어 산업 전체로 파고들었다. 많은 기업이 전통 구축형 모델을 버리고 ‘구독모델 Only’를 선언했다. 한발 나아가 구축형 소프트웨어조차 “커스터마이징 불가”를 전면에 내세우며 영업이익 중심의 전략을 택했다.

그러나 이 전략에는 대가가 있었다. 효율성을 얻는 대신 고객과의 거리가 멀어졌다. 고객들은 이동통신사 갈아타듯 소프트웨어를 바꿀 수 있게 됐다. 기업들은 쉽게 고객을 늘릴 수 있는 장점에 환영하면서도 높은 고객 이탈률을 고민한다.

더 심각한 후유증은 고객의 문제를 함께 풀며 얻는 인사이트, 현장의 피드백이 제품 혁신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프로젝트 이후에도 이어지는 관계가 희생됐다는 것이다.

이는 산업 현장의 맥락과 역동성을 담아야 하는 B2B 소프트웨어에 치명적이다. 그 결과는 AI 시대에 가장 중요한 자산인 산업별 프로세스와 데이터 부족으로 이어졌다.

 

고객과 함께 만드는 가치의 실종

서울대학교 경영대학 이유재 명예교수는 고객 가치를 세 가지 차원으로 정의한다. 기업이 고객에게 주는 가치, 고객이 기업에 가져다주는 생애 가치, 그리고 고객의 참여로 함께 만들어가는 가치다.

구독모델의 장점에 취한 기업들은 낮은 비용과 편의성이라는 ‘공급자 중심의 가치’에만 집중한 나머지, 고객과 함께 가치를 만드는 구조를 스스로 차단해버린 셈이다. 고객이 혁신 파트너로 참여하지 않는 기술 기업의 진화는 정체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기술이나 클라우드 배포 방식 그 자체가 아니라 고객의 요구에 귀를 막았다는 점이다. 많은 기업이 자사 소프트웨어에 업계의 ‘베스트 프랙티스’가 담겼다며 획일화된 도구를 강요했다.

이 과정에서 특히 피해를 입는 곳은 중견·중소기업들이다. 대기업은 협상력을 동원해 커스터마이징을 관철시켰지만, 대부분의 중견·중소기업은 몸에 맞지 않는 ‘기성복 소프트웨어’에 만족해야 했다.

MIT NANDA 연구소의 2025년 보고서에 따르면, 기업의 AI 파일럿 프로젝트 중 95%가 실패했다. 주목할 점은 산업 특화 지식을 가진 파트너와 협업한 경우 성공률이 67%에 달했지만, 자체 개발은 그 3분의 1 수준에 그쳤다는 것이다.

이 수치가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AX(AI 전환)의 성공 여부는 결국 도메인 특화 데이터와 프로세스 이해에 달려 있다. 최근 산업 특화 SaaS 및 AI 기업들이 빠르게 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들은 산업의 암묵지를 시스템 로직에 반영해 현장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한다. 소프트웨어를 기성복처럼 파는 기업들은 가질 수 없는 가치다.

 

‘더 힘든 길’을 택한 기업들

제약 산업에 특화한 버티컬 SaaS 기업 비바시스템즈는 범용 CRM이 해결하지 못하는 제약 산업 고유의 규제와 컴플라이언스를 솔루션에 담아 글로벌 1위가 됐다. 이 회사는 창업 5년 만에 글로벌 대형 제약사 시장의 절반 이상을 장악했다.

국내 대표 ERP 기업 영림원소프트랩도 고객 현장에 깊이 들어가는 길을 택했다. 영림원은 11개 산업별 특화 ERP 모듈을 완성한 데 이어 프로젝트 현장에서 받아들인 고객의 요구사항을 계속 표준 ERP에 담고 있다. 영림원 표준 ERP 화면 수는 2019년부터 2025년까지 6년 사이 75%나 증가했다.

현재 영림원 고객 현장에서 실제로 구동되는 ERP 화면은 약 7만 개에 이른다. 번거로운 특화 개발 과정을 감수하며 고객의 상황에 맞춘 결과다. 반도체 소재·부품·장비를 비롯, 글로벌 시장에서 역동적으로 활약하는 중견·중소기업들이 영림원 ERP를 선택하는 이유다.

역설적인 것은 영림원의 이런 접근이 자사 SaaS ERP의 경쟁력까지 끌어올린다는 점이다. 고객 현장의 맥락이 구축형뿐 아니라 SaaS에도 고스란히 이식되기 때문이다. ‘고객 현장’에 뿌리를 둔 기업은 SaaS조차 ‘산업특화 모델’로 진화시킨다.

비바와 영림원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고객에 의한 가치’를 실현하는 구조를 갖췄다는 점이다. 고객 현장에서 얻은 인사이트가 표준 솔루션으로 환류되고, 이는 다시 다른 고객에게 베스트 프랙티스로 제공되는 선순환 구조다.

 

 

수고로움을 함께 하는 기업에 주어진 보상

결국 기술이 모든 것을 재정의하는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본질은 ‘고객을 대하는 철학’에 있었다. 공급자의 효율성 대신 더 힘들고 덜 효율적인 길을 고집한 기업들이 오히려 강력한 경쟁 우위를 갖게 됐다. 고객의 문제를 내 문제로 보고 함께 답을 찾으며 성장한 시간이 결국 가장 강력한 기술 자산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AX를 준비하는 기업은 기술 파트너를 어떻게 선별해야 할까. 세 가지 질문이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첫째, 우리 산업에서 몇 년간, 몇 개 프로젝트를 수행했느냐다. 도입 사례 수보다 중요한 것은 특정 산업에서 쌓은 경험이다.

둘째, 고객 피드백이 제품에 얼마나 민첩하게 반영되느냐다. ‘고객에 의한 가치’를 말로만 외치는 기업과 실제로 실천하는 기업은 이 부분에서 구별된다.

셋째, 주어진 프로젝트를 끝까지 해내느냐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약속을 지키고, 솔루션 도입 후에도 곁을 지키는 기업이 AX에 가장 적합한 파트너다.

고객 기업의 본업을 가장 잘 이해하고, 가장 가까이에서 고객 곁을 지킨 기술기업. AX 시대의 주인공은 바로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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