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1회 영림원CEO포럼]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과 이타적 개인주의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이 빚은 삶의 방식의 변화 출발점은 ‘이타적 개인주의’”

사회학자 정수복 박사,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과 이타적 개인주의’ 주제 강연

사회학자 정수복 박사가 15일, 201회 영림원CEO포럼에서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과 이타적 개인주의’를 주제로 강연했다.

정 박사는 이번 강연에서 2007년에 펴낸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과 2024년에 출간한 <이타적 개인주의>라는 두 권의 저서에서 분석하고 주장한 것을 전달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새로운 삶의 목표와 새로운 삶의 방식 등을 공유했다.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을 12가지로 요약한 정 박사는 이 12가지 요소가 빚은 부정적인 의미의 한국인의 삶을 방식을 변화시키려면 ‘이타적 개인주의’가 그 출발점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강연 내용.

◆ ‘압축 근대’와 전통의 지속

먼저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 시대 진단부터 해보자. 한 시대는 그 시대와 확연하게 구별되는 새로운 시대와 함께 지난 시대가 된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고 해서 지난 시대에 속했던 정신의 습관이나 물질의 흔적이 깨끗이 자취를 감추는 것은 아니다. 19세기 말 이후 한반도의 역사는 서구에서 시작되어 일본이 선취한 근대를 따라잡기 위한 필사적 노력의 시간이었다. 그후 한국의 근대는 서구사회가 몇 세기에 경험한 근대를 몇 십년만에 달성한 ‘압축근대’였다.

이제 우리는 한 세기 이상의 노력을 통해 산업화와 민주화를 실현해 근대사회의 외양을 갖추게 됐다.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한국사회는 정보기술 분야에서 다른 나라에 앞선 디지털 강국이 됐다. 그럼에도 한국사회에는 아직 전근대적인 요소가 많이 남아있고 탈근대의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짧은 시간 동안에 엄청난 변화를 경험한 압축 근대화의 결과, 시대를 달리하는 전근대-근대-탈근대 요소들이 지금 여기 한국사회에 공존하고 있다. 우리는 이른바 ‘비동기적인 것들의 동시성’을 경험하고 있는 셈이다.

◆ 당연의 세계 낯설게 보기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이란 책의 부제는 ‘당연의 세계 낯설게 보기’이다. 우리는 각각 매일 현실 속에서 주어진 일을 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그 현실은 우리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현실은 우리가 원하는 목표를 얻기 위해 적응하고 협력하고 투쟁해야 하는 공간이다. 그곳에서 우리가 우리의 욕망과 욕구에 근거해 세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논리를 따라야 한다. 그것은 벽처럼 당연하게 서 있고 중력처럼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의 논리에 따라서만 살지는 않는다. 소위 말하는 일이나 사업을 위해서는 현실의 논리를 따르지만 여가 시간이나 잠을 자는 시간은 현실을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대로 꿈을 꿀 수 있다. 최소한 인생의 3분의 1은 잠을 자야 살아갈 수 있다. 24시간 내내 정보가 교환되고 거래가 이뤄지는 세상이 되면서 밤이 없어지고 수면 장애가 늘어나고 있지만 밤에 일한 사람은 낮에라도 잠을 자야 삶을 계속할 수 있다.

장자는 잠을 자다가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는 꿈을 꾸었는데, 일어나서 생각해 보니까 나비 꿈을 꾼 사람이 장자인지, 꿈속의 나비가 장자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무엇이 진짜 현실일까? 우리에게는 당연히 꿈을 꾼 사람이 장자라고 생각되지만 우리는 때때로 현실을 벗어나 나비가 될 때가 있다. 누구나 자다가 꿈을 꾸며, 연주를 듣거나 문학작품을 읽을 때나 골프나 테니스 등의 운동을 할 때 그 속으로 몰입해 자신을 잊어버리기도 하고, 황홀한 사랑을 하거나 종교 예식에 참여하면서 엑스터시 상태에 빠질 때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현실의 논리를 벗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 후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현실의 논리에 묶여있는 삶은 긴장과 스트레스를 유발하기 때문에 때로 우리는 현실 너머의 세계로 잠시 다녀올 필요를 느낀다. 그런데 누구라도 현실을 벗어날 수 없지만 현실의 논리를 벗어나서 다른 현실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과학과 예술과 종교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학자나 예술가나 성직자들은 지금 여기의 현실이 작동하는 방식에 굴복하거나 적응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지금보다 더 확실하고 체계적인 지식을 추구하고, 눈에 보이고 귀에 들이는 일상의 풍경과 소리를 넘어서 다른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고, 현실의 논리를 벗어나는 초월의 세계를 우선시하며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이타주의적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진화생물학적으로 볼 때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주어진 현실을 넘어 다른 현실을 추구했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문명을 이뤘다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 살든 현실과 거리를 두고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때 지금보다 나은 새로운 현실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할 당연의 세계인 현실의 논리를 다른 눈으로 볼 필요가 있다.

◆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은 당연의 세계와의 싸움

그러면 당연의 세계를 낯설게 바라보기를 권하는 김승희 시인의 시 한 편을 읽어 보겠다.

제목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아침에 눈뜨면 세계가 있다

아침에 눈뜨면 당연의 세계가 있다

당연의 세계는 당연히 거기에 있다

당연의 세계는 왜, 거기에,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처럼,

왜 맨날, 당연히 거기에 있는 것일까.

당연의 세계는 거기에 너무도 당연히 있어서

그 두터운 껍질을 벗겨보지도 못하고

당연히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

당연의 세계는 누가 만들었을까

당연의 세계는 당연히 당연한 사람이 만들었겠지

당연히 그것을 만들 만한 사람,

그것을 만들어도 당연한 사람,

그러므로 당연의 세계는 물론 옳다

당연은 언제나 물론 옳기 때문에

당연의 세계의 껍질을 벗기려다가는

물론의 손에 맞고 쫓겨난다

당연의 손은 보이지 않는 손이면서

왜 그렇게 당연한 물론의 손일까

당연의 세계는 물론의 세계를 길들이고

물론의 세계는 우리의 세계를 길들이고 있다

나날이 다가오는 모래의 점령군

당연의 세계는 물론의 세계를 길들이고

물론의 세계는 우리의 세계를 길들이고 있다

당연의 세계에 소송을 걸어라

물론의 세계에 소송을 걸어라

나날이 다가오는 모래의 점령군

하루 종일 발이 푹푹 빠지는 당연의 세계를

생사불명 힘들게 걸어오면서,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은

그와의 싸움임을 알았다

물론의 모래가 콘크리트로 굳기 전에

당연의 감옥이 온 세상 끝까지 먹어치우기 전에

당연과 물론을 양 손에 들고

아삭아삭 내가 먼저 뜯어먹었으면

하루 종일 발이 푹푹 빠지는 당연의 세계를

생사불명 힘들게 걸어오면서,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은

그와의 싸움임을 알았다

물론의 모래가 콘크리트로 굳기 전에

당연의 감옥이 온 세상 끝까지 먹어치우기 전에

당연과 물론을 양 손에 들고

아삭아삭 내가 먼저 뜯어먹었으면”

시인은 물론의 세계와 당연의 감옥을 벗어나기를 꿈꾸고 있다. 우리도 힘들 때는 “세상이 왜 이래?” 또는 “산다는 게 뭐람?”이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가? 그런데 시인도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은 당연의 세계와의 싸움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만큼 당연의 세계이자 물론의 세계는 넘어서기 어려운 강건한 벽이다.

◆ 문화적 문법이란 무엇인가?

2007년에 출간된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은 그해 출판문화대상을 수상하고 중국어와 프랑스어로 번역 중이다. 이 책은 세 가지 차원에서의 벽 허물기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인문학과 사회과학 사이의 벽, 사화과학 내의 분과학문 사이의 벽, 학계와 일반 지식인 사회(문화예술계, 언론계, 종교계, 교육계, 시민사회운동권) 사이의 벽, 정치적 보수와 진보 사이의 벽을 허물고 소통과 대화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 이 책의 기본 의도이다.

그렇다면 책의 제목에 들어있는 ‘문화적 문법’이라는 말 속의 ‘문화’는 무엇일까? 편의상 문화의 의미를 세 차원으로 구별해 볼 수 있다. 첫째, 가장 좁은 의미의 문화는 문학과 예술 분야의 창작과 공연 등을 가리킨다. 둘째, 특정 집단의 일상적 의식과 행위 방식을 가리킨다. 기업문화, 군대문화, 청년문화, 여성문화 등의 문화가 그런 뜻이다. 셋째, 내가 말하는 문화적 문법 차원의 문화이다. 그것은 한 사회가 오랜 세월에 거쳐 축적해 온 세계관과 인생관의 무의식적 차원을 뜻한다. 그것을 기저문화 또는 심층문화라고 부를 수 있다. 바닷물에 비교하면 표면의 파도가 아니라 저류이고, 지층으로 비교하면 표층이 아닌 고층에 해당한다. 그것은 일상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의식 저 건너편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살아간다.

우리가 말을 할 때 언어적 문법에 따라 말하지만 그 문법을 의식하지 못하듯 문화적 문법도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따라하게 되는 규칙이다. 언어적 문법을 어기면 소통이 되지 않듯이 문화적 문법을 따르지 않아도 상호작용이 어려워진다. 문화적 문법은 개인이 집단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행위하는 것을 막는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 일상 생활에서 문법을 어긴 사람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고 여러 번에 걸쳐 문법을 어기면 상대하지 못할 사람이 되고, 그러고 나서도 계속 문법을 어기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게 된다.

나는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에서 그런 문화적 문법의 구성 요소를 추출하고 그것의 종교적 출처와 구조화 과정을 밝히는 작업을 시도했다. 그리하여 근본적 문화적 문법 6개 요소와 파생적 문화적 문법 6개 요소 등 모두 12개 요소를 추려냈다. 이 12개의 구성 요소는 최재석, 박영신, 김경동, 송호근 등 사회학자들의 논의와 이규태, 강준만, 박노자, 진중권 등 대중적 지식인들의 논의, 이밖에 구한말 이후 한국에 대한 관찰한 외국인, 학계, 언론계, 시민운동권 등에서 한국사회의 고질적 문제로 제기된 100여 가지의 문제들을 오랜 세월에 걸쳐 수집하고 나의 관심과 기준에 따라 핵심적인 것들을 추출하고 분류하고 압축한 것이다.

◆ 한국의 근본적 문화적 문법 6개와 파생적 문화적 문법 6개

먼저 근본적 문화적 문법 요소 6개는 ▲현세적 물질주의 ▲감정우선주의 ▲가족주의 ▲연고주의 ▲권위주의 ▲갈등회피주의 등이다.

문화적 문법의 종교적 기원을 밝히는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은 무교(샤머니즘), 도교, 불교, 유교 등 전통 종교의 세계관을 살펴본 다음 그 가운데 ‘무교-유교 결합체’가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의 근본적 요소를 주조하고 지속시키는 결정적 요인이라고 해석했다.

파생적 문화적 문법 요소 6개는 ▲감상적민족주의 ▲국가중심주의 ▲속도지상주의 ▲근거없는 낙관주의 ▲수단방법중심주의 ▲이중규범주의 등이다. 이는 근본적 문화적 문법에서 파생된 문법으로 1876년 개국 이후 ‘압축 근대화’ 과정에서 형성된 문법 요소들이다. 개화기 이후 서세동점의 상황에서 ‘생존’이라는 지상 목표, 일제의 식민 통치, 기독교와 맑스주의의 유입과 영향력 확대, 한국전쟁, 산업화, 정보화, 세계화하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파생적 문화적 문법이 형성됐다.

이러한 문화적 문법들은 그 나름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해 오늘날의 한국을 만드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의 부정적인 역기능도 지적하면서 변화를 촉구했지만 쉽게 바뀌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왜냐하면 12개의 문법 요소들이 서로 모순 없이 서로가 서로를 강화시키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웬만한 충격으로는 해체되지 않는 단단한 구조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12개 요소 가운데 하나라도 바꾸기가 쉽지 않다.

◆ 정치 변동에서 문화 변동으로

이제 다시 한국의 현실로 돌아와 본다. 한국사회는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를 이룩했지만 문화적 문법의 수준에서는 큰 변화가 이뤄지지 않았다. 한국사회의 민주화 세력과 시민들은 정치적인 제도와 법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고, 누가 대통령과 국무총리, 장관과 국회의원이 되느냐라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우리 사회의 문화적 문법의 문제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정권 교체로 제도와 정책의 변화는 가져왔지만 한국인의 사고방식과 행위 양식은 거의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

386 또는 586세대가 주도한 1980년대 사회운동권의 기본 구도로 민족과 계급의 문제였지 민주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민주화운동 세대도 일상의 민주의식은 부족한 상황이다. 이제 제도의 민주화에서 의식의 민주화로 이행할 시기이다. 지금 탄핵 정국이 재현됐지만 2017년 문화사회학회에서 발표한 ‘촛불집회의 사회학’이라는 글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촛불집회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고, 최순실, 김기춘, 우병우 등을 법적으로 처벌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리의 일상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문화적 문법’의 변화가 없는 한 우리들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일상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 정치의 변화는 표면적인 변화일 뿐이다.”

그런 차원에서 2017년 촛불집회에서 널리 알려진 ‘19세 진주 여성’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제목 ‘우리 안의 박근혜, 우리 옆의 최순실’

“분노한 국민들이 박근혜 하야를 외치는 지금 저는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 저에게는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절대 명령적인 어머니가 있습니다.

둘째, 제가 다닌 초·중·고등학교에서는 반 학생 전체의 의견을 묻지 않고 친한 친구의 의견만 듣는 반장들이 있었습니다. 반장의 뒤에서 자신들의 입맛대로 학급의 일을 결정하는 반장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국가에서 두발로, 교복으로, 시간표로, 학생을 통제하는 선생님들이 있었습니다.

셋째, 제가 아르바이트했던 직장에서는 노동자와 노동법보다 돈과 상품을 우선시하는 사장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박근혜 대통령이 하야하면 제가 직면한 가장과 학교와 노동의 문제가 해결됩니까? 저는 행복한 가정에서 살 수 있고 치열한 경쟁이 아닌 배움의 즐거움을 느끼며 공부하고 기계가 아닌 사람답게 노동을 할 수 있습니까?

저는 박근혜 대통령이 모든 문제의 책임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싫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싫습니다.

제 삶의 문제가 박근혜 대통령 한 명의 책임입니까? 최순실 한 명의 잘못입니까? 저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박근혜, 최순실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부모님, 반장, 친구들, 선생님, 회사 사장, 그리고 매일 마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박근혜, 최순실이 시키지 않았는데, 사람답게 행동할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내 안의 박근혜를 발견하고 내 옆의 최순실에 분노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을 돈이나 자신의 소유물로 보지 않고, 사람을 돈과 이익으로 환산하지 않고, 독립적인 존재로 보는 세상이 되면 좋겠습니다. 어쩔 수 없는 경쟁 속에서 남을 밟고 올라서야만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고, 사람답게 살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자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촛불집회 당시 한 여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일상의 폭력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민감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 같다. (…) 박근혜가 그리고 최순실이 일방적으로 잘못을 해서 이 사단이 난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파시즘을 찾아서 고쳐 가자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문화 변동은 결국 문화적 문법의 변화를 말한다. 앞에서 말한 12가지 문법 요소들은 어떤 방법으로 전환시켜야 할까?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변화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먼저 근본적 문화적 문법은 ▲현세적 물질주의와 초월적 정신주의 사이의 긴장과 조화 ▲감정우선주의에서 이성적 합리주의 강화로 ▲가족주의에서 공공성과 정의 실현으로 ▲연고주의에서 합리적이고 공정한 보편주의로 ▲권위주의에서 민주적 상호 존중으로 ▲갈등회피주의에서 갈등의 합리적 해결로 변화해야 한다.

또 파생적 문화적 문법은 ▲감상적 민족주의에서 열린 민족주의와 합리적 세계주의로 ▲국가중심주의에서 국가-시장-시민사회의 조화로 ▲속도 지상주의에서 적정 속도로 지속 가능하게 ▲근거없는 낙관주의에서 신중하고 사려깊은 의사결정으로 ▲수단방법중심주의에서 목적에 대한 성찰과 과정의 의미 살리기로 ▲이중규범주의에서 겉과 속이 같은 윤리적으로 일관된 삶으로 변화해야 한다.

◆ 왜 개인주의인가?

그렇다면 그런 전환과 변화를 누가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 나는 제도의 변화와 합리적인 정책의 수준에서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에 앞서 그리고 그 후에도 계속 필요한 것이 개인의 각성이라고 생각한다. 대세를 따르지 않고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개인이 여기저기 많이 나와서 12가지 문법의 어느 하나라도 변화시키는 모습을 보여줄 때 변화가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곧 개인을 억압하는 위계적 공동체주의보다는 ‘건강한 개인주의’가 문화적 문법을 변화시킬 수 있는 관문이라고 생각한다.

왜 개인주의가 필요한 것일까? 먼저 가족의 약화와 더불어 개인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서구에서는 19세기 이후 1차 개인화가 일어나고 1960년대 후반부터 2차 개인화가 일어났으나 한국에서는 1990년대 이후 짧은 시기에 개인화가 압축적으로 이뤄졌다. 이런 ‘압축 개인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1인 가구가 크게 증가했다. 이혼, 비혼, 미혼으로 혼자 사는 사람이 늘어났다. 출산율이 떨어지고 자살률이 증가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집을 떠나 혼자 사는 젊은이가 늘어났고 직업상의 이유로 가족을 떠나 외지에 홀로 사는 사람도 늘어났다. 수명이 길어지면서 배우자와 자식없이 홀로 사는 독거노인도 늘어났다.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혈연 집단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홀로 살게 된 개인이 크게 증가한 것이다. 2015년 10월 기준 1인 가구가 511만 가구로 전체 가구에서 27.2%를 차지했고 계속 증가 추세에 있다.

개인화가 진행되면서 전통적인 소속감이 약화되고 있다. 가족주의와 집단주의가 개인에게 가하는 압력이 줄어들고 있다. 국가와 직장과 가족이 개인에게 요구하던 헌신은 더 이상 수용되지 않고 있다. 개인은 홀로 살게 되면서 스스로 원하는 삶을 살려고 한다. 누구의 명령이나 충고를 따르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살아가게 된다. 물리적 차원의 개인화가 도덕적 차원에서 개인주의를 촉진한다. 개인화된 개인은 점차 각자가 자기 삶의 주인이자 주체라는 생각을 갖기 쉽다. 국가나 직장이나 가족을 위해 개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위해, 국가, 직장, 가족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산업화와 도시화, 민주화와 가부장제의 해체, 정보화와 교육 수준의 상승은 개인화가 개인주의로 이어질 수 있는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한다.

◆ ‘개인주의 없는 개인화’가 지속되는 한국사회

그런데 한국사회에서는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개인주의에 대한 불신과 반감이 뿌리 깊게 내려있다. 유교적 전통 안의 가족주의와 거기서 파생한 유사가족주의로서의 연고주의와 수직적 위계질서로 이뤄진 집단주의가 개인주의를 쉽사리 허용하지 않는다.

권위주의와 독재체제를 비판한 이른바 민주화 세력에 속하는 사람들도 가족주의, 집단주의, 연고주의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민주화 이후에도 한국사회에는 국가중심주의, 반일민족주의, 가족주의, 권위주의, 지연과 학연으로 이뤄진 연고주의 등 개인주의를 억누르는 힘이 건재한다. 연고주의와 집단주의 논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집단의 논리를 벗어나려는 개인을 ‘배은망덕한 놈’, ‘독불장군’, ‘모난돌’, ‘이기주의자’ 등으로 비난하며 따돌린다. 그래서 속으로는 개인주의자라로 겉으로는 집단주의자로 살아가게 하는 압력을 가한다. 개인의 자율성보다는 집단의 연대성을 강조하는 한국사회의 오래된 ‘문화적 문법’이 지속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유교문화의 전통 속에서 식민지 시대를 거쳐 분단시대로 이어지고 독재와 권위주의 시대를 통과하면서 집단주의적 가치가 오랜 세월동안 개인주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풍토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문화적 문법이 지배하는 풍토에서는 삶의 물리적 조건이 혼자 생각하고, 혼자 판단하고, 혼자 살아가게 바뀌어도 여전히 가족과 연고집단, 소속집단에 기대어 살아가려는 태도를 버리기 어렵다. 그래서 개인화가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있는데도 개인주의가 자연스럽게 등장하지 못한다. 개인주의가 부정적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원자화된 개인들은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살려는 삶의 태도가 부족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집단의 압력 앞에 자기 자신의 뜻을 굽히고 기존의 삶의 태도와 방식을 마지못해 따라 살게 된다. 개인화는 이뤄지고 있는데 개인주의는 아직 뿌리 내리지 못한 상태이다. 특히 가족을 단위로 생존과 번영을 추구한 한국인들은 가족이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임에도 가족주의적 삶의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가족이 약화되고 해체되어 탈가족화와 개인화가 증가하고 있지만 가족주의를 벗어나 개인주의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개인주의 없는 개인화’가 지속되고 있다.

개인주의 없는 개인화는 수많은 문제를 낳는다. 그 하나의 본보기로 우리나라의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은 개인화는 계속되는데 건강한 개인주의가 부재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물리적으로는 개인으로 분리됐지만 정신적으로는 계속 가족주의에 기대에 살다가 가족이 지지 기능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됨에 따라 삶을 지속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제야말로 개인주의를 동반하는 개인화가 필요한 시기이다. 각자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으로 살아가면서 상호존중과 협력을 바탕으로 개인들 사이에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모든 인간관계를 집단주의에 근거한 수직적 인간관계에서 개인주의에 기초한 평등한 인간관계로 바꿔나가야 한다.

◆ 긍정적이고 건강한 개인주의란?

현재 한국사회에서 개인주의라는 말이 널리 쓰이지만 거기에는 여러 가지 뜻이 담겨있다. 크게 부정적 의미와 긍정적 의미로 나눠 볼 수 있다. 부정적 개인주의는 곧바로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 나르시시즘, 자기도취, 배꼽주의, 지나친 경쟁의식, 각자도생, 물리적 쾌락주의로 이어진다. 언론과 매체들에 따르면 1990년대 신세대에서 요즘의 MZ세대에 이르기까지 젊은이들의 행위 지향성에서 이런 경향이 많이 나타난다고 한다. 이런 식의 부정적 개인주의라면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의 대안이 되기 어렵다.

그렇다면 긍정적이고 건강한 개인주의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주체성과 자율성에 기초하되 책임감과 공공의식을 포함하는 개인주의다. 독자성, 독창성, 자기실현, 삶의 일관성을 추구하고,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발명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 나가는 개인주의를 말한다. 그런 개인주의자는 다른 사람의 권리를 자기의 권리만큼 존중한다. 사회 전체적으로 건강한 개인주의자가 많아질수록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원칙에 의해 공적인 일이 공정하게 처리될 것이다.

미국의 세계적 사회학자 로버트 벨라는 개인의 영혼이 갖는 고유성을 존중하는 도덕적 개인주의를 옹호하면서 그런 개인주의를 합리적 계산을 바탕으로 각자의 자기 이익을 배타적으로 추구하는 타산적 개인주의와 구별했다.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과학자와 지식인과 금융인을 배출한 유대인들의 교육의 핵심은 개성을 존중하는 데 있다. 부모와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최고의 사람’이 되기보다는 오로지 하나밖에 없는 ‘고유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친다.

억압과 권위주의 시대에 ‘멸사봉공(滅私奉公)’이라는 말이 많이 쓰이면서 개인을 억압하고 말로는 공익을 내세웠지만 뒤로는 사익만 추구했던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해서는 ‘활사개공(活私開公)’이라는 말이 널리 쓰여야 한다. 개인의 활력을 북돋우고 열린 개인들이 사익을 추구하면서도 공익을 생각하는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런 공동체는 ‘동이불화(同而不和)’, 곧 개성이 없이 다 비슷비슷하면서도 서로 다투고 싸우는 그런 공동체가 아니다. ‘부동이화(不同而和)’ 곧 서로 다르고 개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 다름이 조화를 이루는 그런 공동체가 돼야 할 것이다.

과거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으로 성장하고, 구성원들이 자유롭게 소통하고 협력하는 조직, 연령과 성별, 계층과 지위에 관계없이 모든 타인의 인격을 존중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런 문화적 문법이 자리잡기 위해서는 가정과 학교와 일터에서 구성원들 사이의 상호작용 속에 스며들어 있는 오래된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을 드러내고 깊게 오래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현실은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지금 여기의 현실을 성찰적으로 바라보며 미래를 지향하는 비전을 만들어 나갈 때 서서히 시행착오를 겪으며 변화할 것이다. 이번 강의가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왔던 우리들이 살아가는 방식인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 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박시현 기자> shpark@it-b.co.kr
영림원CEO포럼에서 강연된 내용은 아이티비즈 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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