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룡’의 리더십이 조선을 지켜냈다”

오원석 성균관대 교수, 제118회 영림원CEO포럼서 강연


오원석 성균관대학교 경영학부 교수가 12일, 제118회 영림원CEO포럼에서 ‘조선 선비의 삶에서 얻는 지혜’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오 교수는 “선비사상에서 본 리더십의 본질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이며, 이를 위해 조선 선비가 갖춰야할 덕목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등 오상(五常)이었다”면서 “조선 선비의 리더십을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준 사람이 서애(西厓) 유성룡으로, 서애는 선공후사, 청렴, 직언, 공정성 등 4가지를 모두 갖춘 리더십으로 조선을 국란에서 지켜냈다”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강연 내용

조선이 518년을 유지했던 힘은? = 중국 역사는 5천여년이다. 5천여년 동안 왕조가 83번 바뀌었는데 200년 넘게 지속한 왕조는 한, 당, 요, 명, 청 등 다섯뿐이었으며, 70년 이상 지속한 왕조는 14개에 불과했다.
조선은 영욕을 교차하며 518년이나 유지했으며 역대 임금은 27명이었다. 이렇게 오랜 기간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던 조선의 리더십의 본질이 무엇이었을까? 서애 유성룡에게 초점을 두고 이를 설명하고자 한다.
우리나라 전 역사에서 가장 큰 국란은 한국전쟁과 임진왜란이었다. 한국전쟁으로 500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임란 때는 당시 조선 인구의 500만명 가운데 40% 가량인 200만명이 죽었으며, 포로로 잡혀간 사람은 20만여명이었다. 임란 이후 왜적이 떠난 조선은 한마디로 빈 땅이었는데 이후 300여년을 면면히 이어나갔다. 조선을 임란에서 지켜냈던 가장 큰 공헌자는 유성룡과 이순신이다. 이들이 없었다면 조선이 어떻게 되었을 지를 생각할 수 없다.
유성룡은 선비의 리더십으로 조선을 지켰다. 유성룡의 호 서애(西厓)는 서쪽 언덕이라는 뜻이다. 1541년에 태어나 1607년에 죽은 유성룡의 고향은 지금의 안동 하회마을이다. 낙동강이 마을을 휘감아 돌아가는 물돌이 마을이다. 낙동강이 범람해도 마을에는 침범하지 못했는데 그 마을의 서쪽 언덕이 물을 막아냈다. 유성룡은 서쪽 언덕이 마을을 지켰듯이 자신은 나라의 서쪽 언덕이 되겠다고 해서 호를 서애라고 했다.
유성룡의 출생지는 의성이었으며, 유년 시절은 한양에서 벼슬을 한 아버지를 따라 서울 인현동에서 보냈다. 인현동 집 근처에는 이순신이 살았는데 둘은 어린 시절을 함께 지냈다. 지금의 충무로는 인현동 앞길이다.

퇴계 “유성룡은 하늘이 낸 사람” = 서애는 4세 때 문자를 깨쳐 신동 소리를 들었다. 20세 때에는 맹자를 스무 번이라 읽어 지도자 자질을 닦고 지도자 철학을 깨우쳤다. 맹자의 구절 중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고 군주가 가장 가볍다”에 큰 감명을 받았다.
21세 때는 위대한 스승 퇴계 이황을 만났다. 당시 퇴계의 나이가 60세였다. 퇴계의 문하에는 300여명의 제자들이 있었다. 퇴계는 유성룡을 처음 보고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극찬을 했다. 60세의 노학자가 사람을 보고 이런 말을 하는 것에 대해 제자들은 깜짝 놀랐다. 300여명의 제자 가운데 정승은 9명, 판서는 40명이 배출됐다.
퇴계는 왜 서애를 보고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했을까? 첫번째, 서애는 외모가 출중했다. 선조는 서애에 대해 “경은 바라보기만 해도 존경심이 우러난다”고 했고, 백사 이항복은 “서애 앞에 서면 변명이나 거짓말을 할 수 없다”고 했다.
두번째, 성품을 들 수 있다. 서애는 명석한 두뇌와 박학한 지식의 소유자였지만 누구를 만나더라도 주로 듣는 편이었다. 겸손한 자세하고 신중한 자세를 견지했다.
서애가 퇴계 문하에서 가장 많이 공부한 책은 주희의 근사록(近思錄)이었다. 근사록은 성리학자들의 사상과 학문을 간추린 것이다. 서애는 퇴계에게 수학한지 7개월만에 떠나는데 퇴계가 서애에게 빨리 조정에 들어가라고 권고했기 때문이었다.

조선 선비 다섯 가지 덕목 ‘仁義禮智信’ = 조선 선비가 갖춰야 할 덕목은 다섯 가지였다. 첫째, 인(仁)이다. 인은 논어에 100번 넘게 나온다. 맹자는 인을 측은지심(惻隱之心), 즉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정의했다.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는 마음이 측은지심이다. 요즘 말로 가슴이 따뜻한 사람인 듯 싶다. 인은 인간이 갖춰야할 가장 숭고한 덕목이다.
둘째, 의(義)이다. 맹자는 의를 수오지심(羞惡之心)이라고 했다. 양심을 갖고 태어난 인간으로서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의의 반대는 이(利)이다. 이는 눈앞의 이익만을 취하는 마음이다. 안중근 의사가 여순 감옥에서 붓으로 썼던 견리사의(見利思義)가 떠오른다. 안중근 의사는 여순 감옥에서 근사록을 여러 번 읽었다고 한다. 무엇이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가? 인간이 양심을 무시하고 이익을 취하면 실패하기 마련이다.
셋째, 예(禮)이다. 맹자는 사양지심(辭讓之心), 공경지심(恭敬之心)이라고 했다. 예는 남을 섬기는 마음, 하인(servant)같은 마음으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이다.
넷째, 지(智)이다. 맹자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라고 했다. 분별력, 통찰력, 판단력이라고 할 수 있다.
다섯째, 신(信이다. 이 신은 한나라 유학자 동중서가 앞의 네 가지 덕목에 새로 추가한 것이다. 이 다섯가지 덕목을 오상(五常)이라고 한다. 유학 사상에서 본 리더십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인데 바로 이 오상을 지키는 것이 자기를 닦는 방법이다.
서울 장안의 사대문(四大門)과 보신각(普信閣)은 오상을 각인하도록 한 조치였다. 서울 성곽의 길이는 17.7킬로미터로 동서남북에 4개의 큰 문이 있다. 동쪽은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은 돈의문(敦義門), 남쪽은 숭례문(崇禮門), 북쪽은 홍지문(弘智門)이다. 이 4개의 문은 종로에 있는 보신각 종이 울리면 열고 닫혔다.

조선 5대 명재상의 요건 ‘선공후사·청렴·직언·공정성’ = 서애는 25세 때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섰다. 당시 임금은 선조였다. 선조는 정식 왕비로부터 난 직계가 아닌 후궁으로부터 난 방계의 첫 번째 임금으로 재위 기간이 41년이었다. 조선에서 50년 이상 재위한 왕은 영조 1명뿐이었으며 40년 이상은 선조, 숙종, 고종 3명이었다. 선조에 대한 평가는 대체적으로 부정적이다. 시기가 심하고, 겁이 많고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는 점 등이 그 이유다.
조선의 5대 명재상은 세종 때 황희, 선조 때 유성룡, 광해군 때 이원익, 인조 때 김육, 정조 때 체제공이었다. 명재상의 요건은 첫째가 선공후사(先公後私)이다. 임란 때 왜군이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한양 근처에 이르자 선조는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몽진을 하게 되는데 모두 8명의 자녀를 뒀던 유성룡은 가족의 생사에 대해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고 한다.
둘째는 청렴이다. 조선시대에 훌륭한 가문의 기준은 청백리(淸白吏)와 대제학(大提學)의 배출 수였다. 이 원리는 지금도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
셋째는 직언, 넷째는 업무 처리의 공정성이다. 서애는 이 4가지 모두를 겸비했다.
서애와 이순신의 만남은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장면이다. 이순신(1545~1598)은 서울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이순신의 가계를 보면 5대 할아버지는 대제학, 할아버지는 연산군 스승을 지냈다. 그런데 아버지가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고 가세가 기울자 어머니 고향인 아산으로 내려갔다가 가세가 나아지자 다시 인현동으로 돌아왔다.
이순신은 4살 위인 서애와 인현동에 살면서 서당을 함께 다녔다. 서애는 이순신에게 “너는 담력이 크고 용맹하며 무인의 기질이 강하니 무과에 가라. 나는 문과에 가겠다”고 하면서 “문과 급제는 가문의 영광이겠지만 무과에 급제하면 조선의 영광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서애와 이순신의 만남 = 이순신은 서애의 충고를 받아 들여 22세 때 문과에서 무과로 바꾸고 28세 때 무과에 응하는데 낙방하고 31세 때야 무과에 급제했다. 그 때 무과 급제자는 모두 28명이었다. 면접관이었던 병조판서 김구영은 이순신이 보통 인물이 아닌 것을 알고 자기 소실의 딸을 이순신에게 주겠다고 했다. 이순신에게 이 제안은 권력자의 사위가 될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20세 때 이미 결혼한 이순신은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이순신은 이후 15년 동안을 함경도 험지 등에 근무하며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46세가 되어서야 병조판서가 된 서애의 천거로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됐다. 종6품의 정읍현감에서 6단계나 오른 정3품의 벼슬을 맡게 된 것이다.
이순신은 23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다. 가장 극적인 전투가 명량 해전이었으며 그 때 이순신은 삼군수군통제사였다. 하지만 이순신은 조정을 무시하고 왜적을 피하고 남의 공을 뺏었다는 모함을 받고 관직이 삭탈되고 고문까지 당하게 됐다.
이순신이 1차 고문을 받은 후 선조의 첫 물음은 “아직 안 죽었느냐”였다. 2차 고문을 앞두고 퇴계 문하생으로 당시 이조판서였던 정탁은 목숨을 걸고 이순신을 변호하는 신구차(伸救箚) 상소문을 선조에게 올려 이순신을 구해냈다. 이순신은 이후 백의종군을 하였는데 선조는 “살아서 돌아오지 마라”고 했다.
명량 전투에서 조선의 승리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왜적은 103척 중 70척이 침몰하고 3천여명이 죽었지만 조선군은 13척 중 2척만이 파손되고 사망자는 2명이었다. 이순신은 “하늘이 조선을 도왔다”고 했다. 이순신은 노량전투에서 도망가는 왜적을 한명도 살려 보내서는 안 된다며 끝까지 쫓다가 끝내 죽게 되는데 이순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선조의 말은 “알았다”는 한마디뿐이었다.
이순신은 살아생전에 서애 유성룡과 정탁에 대한 은혜를 잊지 않았다. “이 은혜는 살아서 갚을 수 없다. 대대손손 갚아야 한다”고 후손들에게 당부했다. 지금도 덕수 이씨 이순신의 후손들은 매년마다 서애와 정탁에게 제사를 드리고 있다.


<박시현 기자> pcsw@bikorea.net

 

영림원 CEO포럼에서 강연된 내용은 ㈜비아이코리아닷넷의 [영림원CEO포럼]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http://www.bikorea.net/news/articleView.html?idxno=14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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