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7회 영림원CEO포럼] “국가 대전략은 왜 중요한가?“

“국가 대전략의 부재는 파멸을 부를 수 있다”

한국공인회계사회 최중경 회장, 137회 영림원CEO포럼 강연

한국공인회계사회 최중경 회장이 8일 137회 영림원CEO포럼(blog.ksystem.co.kr/ceo-forum/ceo-forum/)에서 ‘국가 대전략은 왜 중요한가?’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최중경 회장은 경제 관료 출신으로 지식경제부 장관을 역임했다. 2011년 장관직을 마치고 2012년에 미국으로 가 공화당의 씽크탱크인 해리티지 재단의 객원연구위원으로 1년간 재직했다.

최 회장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과 한국의 선택’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번 강연에서 “해리티지재단에서 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미국에 대한 공부가 부족하다는 점을 느꼈다. 미국 안에서 본 미국은 많이 달랐다”라면서 “경제도 중요하지만 이보다 더 상위 개념은 국가 안보 곧 국방이다”라고 밝혔다. 다음은 강연내용.

◆“국가 시스템의 설계가 중요하다” = 이번 강연에서는 국방이라는 관점에서 국가 대전략이 중요한 이유를 들여다보려고 한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국가 대전략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나 성찰이 없다.

동물에게도 전략이 있다. 독수리는 먹이가 부족한 환경에서는 1주일의 시차를 두고 각각 두 개의 알을 낳는다. 동시에 두 개의 알을 낳으면 먹을 게 없어 영양실조로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환경에 적응해 생존하려는 동물들의 생존본능을 엿볼 수 있다.

미국은 언제부터 세계 최강이 되었으며, 어떻게 해서 세계 최강이 되었나?

1861년에서 1865년까지 남북전쟁을 치르며 세계 제1위의 산업대국이 되었지만 군사적으로도 명실공히 세계의 리더가 된 것은 두차례의 세계 대전을 통해서이다. 1차 세계 대전 후 영국, 프랑스와 대등한 지위에 오르고,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는 영국, 프랑스를 압도했다.

미국이 세계 최강이 된 배경에는 개인의 자유, 자유기업체제, 무간섭주의를 뼈대로 하는 건국이념,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이민정책, 특허권 제도에 있다.

1840년에서 1918년까지 2,750만명의 이민자가 미국에 유입되었는데 기술력을 가진 유럽인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미국은 1787년 헌법에 특허권과 지적재산권을 규정해 명시했다.

유럽인의 기술 이민에다 자유기업체제와 특허권 보장은 미국에게 산업과 기술의 발전을 가져다주고 세계 최강국이 되는 원동력이 됐다.

미국이 세계 최강국이 된 그 배경을 통해 국가 시스템의 설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여실히 알 수 있다.

◆미국의 한반도 전략 “절대적인 것은 없다” = 미국은 한반도의 가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스티븐 보즈워스 전 미국대사는 남북통일이 되어도 미군은 한반도에 주둔할 것이라고 했으며, 오바마 전 대통령은 한미동맹은 아태지역 평화와 안전의 핵심이라고 했다.

그런데 미국의 한반도 전략은 그 때 그 때 왔다 갔다 했으며, 절대적인 것은 없었다.

미국은 역사상 한국을 세번이나 버렸다.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미국이 필리핀을,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할 수 있도록 했으며, 1945년 얄타회담에서는 한반도가 38도선을 경계로 미 소 양국에 분할 점령되는 계기를 마련하고, 1950년에는 아시아 태평양 방어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하는 에치슨라인을 선언해 한국전쟁 발발의 원인이 됐다.

한반도의 가치는 미군의 전략과 전술에 의해서도 좌우됐다.

미국은 2007년 QUAD(동북아 안보협력체제)에 일본, 호주는 참여시키고 한국은 뺏다. 한국을 일본의 전초기지로 삼으려는 의도였다. 신 에치슨라인이라고 할만하다.

미국이 이러한 한반도 전략을 내놓은 것은 원거리 타격 능력이 크게 발전하면서 굳이 육로가 아니라도 충분히 중국을 견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이다. 실제로 미국은 해병대를 감축했는데 상륙 작전을 줄이겠다는 계산이 깔려있다.

◆조선과 일본의 너무나 달랐던 개항정책 = 19세기에 세계 산업 최강국이 된 미국은 해외 식민지 개척에 눈을 뜨고 쿠바, 필리핀에 이어 포경 산업기지로 하와이를 획득했다. 이후 동아시아로 눈을 돌렸는데 해외 열강들의 싸움이 심한 중국보다는 한국과 일본에 눈독을 들였다.

일본은 1854년에, 조선은 1876년에 개항을 했는데 두 나라의 개항정책은 달랐다.

일본은 이미 17세기에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난학(蘭學, 란가꾸)이라는 학풍을 정립하고 발전시켜 나갔다. 그러다가 일본에 온 미국의 증기선을 보고 놀라 뭔가 새로운 것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1854년에 미국과 가나가와 화친조약(미일 화친조약)을 맺는다.

일본은 이 가나가와 화친조약을 계기로 개항에 박차를 가하고 1867년에는 명치유신을 단행해 탈아입구(脫亞入歐)를 기치로 내걸고, 영어 공용어 지정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어 미국, 영국과 연합해 선진 군사기술 도입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하지만 조선의 개항 정책은 달랐다. 1871년에 신미양요 사건이 일어났는데 미국의 목적은 전쟁이 아닌 통상이었다. 그런데 조선은 미국의 이런 의도를 파악하지도 않은 채 침략 행위로 규정하고 대포를 쏘며 대응했다. 이 싸움에서 세계 최고의 무기로 무장한 미군의 손실은 제로였으며, 조선은 거의 전멸했다.

그럼에도 미국은 조선과는 안 되겠다고 판단해 일단 후퇴하는데 조선에서는 패전을 승전으로 둔갑시키고, 낙후된 무기 체계를 개선하려는 아무런 반성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 정책을 강화했다.

◆조선 난맥상의 뿌리는 ‘양반층의 권력과 부의 독점, 둔재 양산’ = 조선은 이로부터 10년이 지나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는데 이 일은 오히려 조선의 명줄을 줄이는 계기가 됐다. 구식군인들의 반발로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청나라 군대가 들어오고 청의 내정 간섭은 더욱 심해졌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다. 동학혁명의 요구는 왕정 타도가 아니었음에도 조정은 이를 왕조의 위기로 잘못 받아들였다.

청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보내자 일본도 톈진 조약을 빌미 삼아 조선으로 곧 군대를 파병했다. 톈진조약은 임오군란의 부산물로, 청나라가 조선으로 군대를 보내면 일본도 군대를 보낸다는 협약이었다.

청나라에 대한 원병 요청은 조선 조정의 답답한 외교 난맥상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조선 조정의 난맥상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 조선은 당시 외교정책으로 청나라 참사관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이라는 책의 주장을 받아들였는데, 그 내용은 조선은 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 연미국(聯美國)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청나라 입장에서 러시아의 남진을 막고자 하는 목적으로 쓰인 것으로 당시 세계 강국인 영국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 맹점이었다.

또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이었던 앨리스 루즈벨트가 일본, 필리핀, 중국 등지의 아시아 지역을 순회하면서 홀로 1905년 조선을 방문했는데 “미국의 공주가 왔다. 미국이 일본의 마수로부터 구해줄 것”이라고 그릇된 인식을 했다. 당시 미국 선교사나 신부가 수십명이나 되고 조선인으로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있었는데도 직접 만나 얘기를 들으려는 시도가 없었다.

이러한 조선의 난맥상의 뿌리는 양반 관료들의 권력과 부의 독점, 그리고 둔재 양산에 있다.

◆“조선이 붕괴한 이유는 국가 대전략의 부재” = 국가 대전략이라는 것은 국가의 존속과 발전을 위한 군사 및 외교 차원의 선택이다. 조선이 붕괴한 이유는 국가 대전략의 부재 때문이다.

국가 대전략의 실패사례는 비단 조선뿐만이 아니다. 일본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의 반대를 무릅쓰고 태평양 전쟁을 감행했다. 나치가 승리하고 미국은 전쟁을 원치 않으므로 초반에 기선을 제압하면 강화를 요청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결과는 나치가 패전하고, 미국은 엄청난 산업 역량과 강력한 응징 의지를 보여줬다.

카르타고, 나폴레옹 등의 사례도 국가 대전략을 잘못 설계하면 그 결과가 어떠한 지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했을 때 고구려는 왜 침묵할 수 밖에 없었는지가 의문이다. 왜군조차도 백제에 원군을 보냈는데도 말이다.

고구려는 나당연합군의 백제 공격이 나중에 고구려 공격을 위한 사전 조치라는 것을 몰랐을까? 이 역시 국가 대전략의 부재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과 한국의 선택은? =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은 오바마 행정부에서는 아시아 지역 시장 확산(Asia Pivot)과 중국 포위(Contain China)가 그 골격이었다.

이러한 전략은 군사적으로는 일본의 재무장, 경제적으로는 TPP(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로 나타났다.

아베노믹스의 실체는 경제 논리가 아니라 동북아 안보체제의 개편이라는 시각에서 봐야 한다. 미국은 일본의 국방력 강화를 승인했다.

트럼프 행정부 들어서도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은 이 지역의 시장 확산과 중국 포위에는 변함이 없지만 일본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러시아의 역할을 확대해 중국을 견제하려는 것은 달라진 모습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또 ‘TPP 반대, 오바마 케어 반대’를 외치고, ‘아메리카 퍼스트’를 강조하고 있다.

국가 대전략이라는 측면에서 한국은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먼저 국제법에 충실한 대응을 해야 한다.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 중이며, 중국은 우리의 반대 편에 있다. 조중상호방위조약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대치하고 있는 국면이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우리는 어설픈 중립을 유지해서는 안 되며 냉철하게 한쪽 편을 들어야 한다.

또 현장감 있는 실리를 추구해야 하는데 미국이 기축 통화국으로서 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중국이 언제 쯤에 미국을 추월할 것인지에 대해 관심이 높은데 중국이 세계 제일의 경제 대국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하지만 우주기술이나 해군력, 원거리 정밀 타격 능력 등 군사적인 측면에서 중국은 미국보다 40년이나 뒤처져 있다. 동아시아 세력 판도에서 미국의 절대적인 우위는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다.

우리나라 보수층 일각에서 안보는 미국에, 경제는 중국에 중점을 둬야 한다는 안미경중(安美經中)이라는 주장을 제기하는데 이는 한반도의 군사 전략적 가치를 떨어뜨린다는 점에서 걱정이 된다. 만일 미국과 중국이 협력관계로 돌아서면 한국은 미국과 중국 모두에게 신뢰를 잃을 수도 있다.

전략적 모호성(Strategic Ambiguity)도 경계해야할 문제이다.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밸리는 “어중간한 중립은 파멸을 부른다”고 했다.

우리가 이와 관련해 생각해야할 것은 첫째, 사드는 전략적 모호성의 대상이 아니다. 둘째, 전략적 모호성은 절대적 강자만이 취할 수 있는 전략이다. 셋째, 우리가 강대국 사이에서 모호성을 유지하게 되면 적극적 교전 규칙 시 미국과 중국 모두로부터 공격을 당할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제언 =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제언을 해본다.

첫째, 과거의 분노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로 나아가자.

둘째, 한국은 칩(Chip)이지 플레이어(Player)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하자.

셋째, 워싱턴에 투자하자.

넷째, 과대선전은 금물이다.

다섯째, 역사교육 방식을 개혁해야 한다.

여섯째, 국가지배 구조의 개편이 필요하다.

일곱째, 씽크탱크를 만들어야 한다.

이 가운데 특히 경계해야할 것은 과대 선전이다. 우리 정부는 1994년에 “2000년에 이르면 한국이 영국을 제치고 G7에 갈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즈는 꼭지가 돌아 한국은 앞으로 망할 것이라는 기사를 내보내는 등 처절한 복수를 벌였다. ‘잘못은 용서 받을 수 있지만 모욕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국산 초음속 전투기 T50도 우리 정부의 과대 선전 사례이다. 정부는 자체적으로 만든 무기를 이라크, 인도네시아에 판매했다고 자랑했다. 하지만 T50은 록히드 마틴의 엔진을 기반으로 하는 조립품이었을 뿐이며, 그 조립도 미국 기술자들이 했다.

<박시현 기자> pcsw@bikorea.net
영림원 CEO포럼에서 강연된 내용은 ㈜비아이코리아닷넷의 [영림원CEO포럼]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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