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회 영림원CEO포럼]“민족의 정신 속에 살아있는 영웅, 이순신“

“이순신 리더십의 핵심은 항상 전체를 보는 안목”

송우혜 작가 제129회 영림원CEO포럼 강연

소설가 송우혜씨가 11일 제129회 영림원CEO포럼에서 ‘민족의 정신 속에 살아있는 영웅, 이순신’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송우혜 작가는 “항상 전체를 보는 안목을 갖고 있고 여기에 걸 맞는 행동을 하고, 기존 전통을 파괴하는 진취적인 전략과 전술로 오직 힘써 싸워 승리하는데 집중하고, 몸소 앞장서 솔선수범하는 자세가 이순신에게 배워야할 리더십이다”라고 했다.

송 작가는 특히 “이순신에 대한 역사적 사실의 왜곡으로 실제 모습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부문이 많다”며 “이순신 바로보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戰功의 기준은 수급이 아닌 힘써 싸우는 것” = 이순신은 전쟁에서 진취적인 전략과 전술을 구사했다.

전통적으로 戰功의 평가 기준은 적의 목을 얼마나 베었는지 곧 수급(首級)이었다. 이순신은 수전의 특성 때문에 수급이 전공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군사들이 죽인 적이 바다에 떨어지면 건져서 머리를 베고 간직하려 들면 전투에 큰 지장을 끼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수급이 아닌 힘써 싸우는 것을 전공의 기준으로 세우고 실행했다. 부하들에게 뿐만 아니라 선조에게 올린 장계에도 이를 명백하게 밝혔다.

그러나 선조는 이순신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선조는 “명나라 장수들은 수급을 속여 전공을 높이려고 하지 않는다”며 “전공은 수급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고 강요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거듭 “힘써 싸우는 것만이 전공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존의 관행과 임금이나 권력의 강요에 굽히지 않고 자신의 소신대로 전쟁을 이끌었던 이순신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한 대목이다.

이순신은 전략과 전술의 진취성을 넘어 스스로 앞장서 솔선수범하는 장수이기도 했다. 1592년 5월 사천전투에서 이순신은 왼쪽 어깨에 총탄을 맞았다. 뒤에 함대를 두고 안전하게 전투를 지휘한 것이 아니라 맨 앞에 서서 몸소 전투를 이끌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것이 병사들이 전투를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힘써 싸웠던 비결이었다.

◆“군관이 아닌 최고 지휘자의 시각에서 행동” = 통치자가 갖춰야할 덕목은 전체를 보는 시각이다. 전체를 보는 시각이 있으면 행동 양식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이순신의 리더십의 핵심은 항상 전체를 보는 안목으로 생각하고 이에 걸 맞는 행동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순신이 그 이름과 존재를 임금과 중신들에게 알린 사건은 1583년 함경도 육진에서 발생한 여진족과의 전투에서이다. 니탕개라는 여진족 대추장이 1만기를 몰아 육진 지방을 침략해 전란이 발발하자 이순신은 남부병마절도사 이용을 따라 군관의 자격으로 참전했다.

싸움터에 도착한 이순신은 정공법으로는 전란을 끝낼 수 없을 것으로 보고, 유인책을 써서 적군의 최고 수뇌부 3인방 중 제2인자인 우을기내를 생포했다. 그러자 북부병마절도사가 우을기내의 목을 쳐서 조정에 보내고, 선조는 그 머리를 동소문 밖에 걸어 백성들이 전란의 공포에서 벗어나도록 했다. 우을기내의 처단을 계기로 여진족의 기세는 수그러들고 마침내 전란은 종식됐다.

한명의 군관으로 참전했지만 최고 지휘자의 시각에서 했던 행동을 보여주는 한 대목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선조가 이순신의 공적을 치하하지 않고 “속여서 한 것은 의로운 일이 아니다”라며 오히려 폄하했다는 사실이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에 이미 선조나 조정 중신들에게서 전쟁을 잘 치러낼 무장으로 주목을 받았다. 임란 발발 3년전인 1589년 선조는 일본의 침략 조짐에 무장을 추천하라고 명했는데 당시 조정의 최고 실세들은 이순신을 추천했으며, 나중에 선조 자신도 이순신을 추천하기도 했다.

◆“이순신 바로보기 필요” = 이순신은 한민족의 위대한 영웅이지만 그의 실제 모습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거나 왜곡된 부분이 많다. 이순신 바로 보기가 필요한 이유이다.

단적으로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이순신을 초라하고 불쌍한 장수로 묘사했다. 유성룡은 “이순신은 과거 급제 후 10년이 지났지만 겨우 종6품 정읍현감이 되었다. 임금이 비변사에 명해 장수를 천거하라고 하자 내가 순신을 천거해 비로소 수사가 되었다”고 썼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순신은 1576년 과거에 급제한 뒤 4년 만에 종4품으로 올랐다가 2년 뒤 좌천되고 1589년 3품으로 다시 승진했다.

선조실록을 보면 반드시 크게 다뤄야할 이순신 관련 사건들을 의도적으로 싣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이순신이 임란이 발발한 임진년에 한차례 부산진 공작전을 펼쳤을 뿐, 그 뒤로는 선조의 지시를 거부하고 부산진공작전을 벌이지 않았다는 것이 현재 많은 연구자들의 견해인데 이는 역사적 사실과 완전히 다르다. 이순신은 임란에 이어 1597영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삼도수군 함대를 거느리고 부산에 진공해 승첩을 거뒀다. 또 정유재란 발발 이후 선조가 이순신을 숙청하려고 할 때 이순신은 제2차 부산 진공작전을 실행해 승첩을 거뒀다. 그리고 이순신은 제2차 부산진공작전에 관한 장계를 선조에게 올렸다. 그런데 이 승첩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이순신의 장계 내용이 선조실록에서 빠져 있다.

선조실록은 부산진 공작전에 대한 이순신의 장계는 아예 싣지 않고, 그 장계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원균의 장계를 실었다. 이순신에 대한 반감과 원균에 대한 호의가 작용한 처사이다.

1597년 정유년 9월 이순신은 명량대첩을 거두고 승첩 장계를 선조에게 올렸지만 선조실록에는 반영되지 않았다. 현재 선조실록에 기록된 명량대첩에 관한 언급은 명나라 고관들이 선조와 면담하면서 명량대첩을 이룬 이순신을 칭송한 말들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박시현 기자> pcsw@bikorea.net

 

영림원 CEO포럼에서 강연된 내용은 ㈜비아이코리아닷넷의 [영림원CEO포럼]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http://www.bikorea.net/news/articleView.html?idxno=17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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