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리아 시대,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김상근 연세대 교수 영림원CEO포럼서 ‘아포리아 시대의 인문학: 군주의 거울’강연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7일 제120회 영림원CEO포럼에서 ‘아포리아 시대의 인문학: 군주의 거울’을 주제로 강연했다. 김 교수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크세노폰이 쓴 『키루스의 교육』이라는 책을 통해 아포리아 시대의 돌파구로 ▲개인의 의지가 아닌 법에 의거한 정의의 실현 ▲동행하는 삶, 파토스의 리더십 ▲평등한 기회 제공과 공정한 보상 ▲상황에 따른 전략의 신속한 변화 ▲자신의 행복을 포기할 수 있는 자세 등을 들었다.


출구가 없는 시대, 리더의 역할은? = 아포리아(Aporia)란 무엇인가? 그리스어로 ‘출구가 없는(No Exit)’, 해결책이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의 상태이다. 세월호 생존학생들의 법정 증언 중에 “선장이나 선원들이 더 지식이 많으니 ‘믿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선실에서 기다렸다. 하지만 도움을 준 어른은 없었다”는 말을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데 ‘도움을 준 어른은 없었다는 그 상태’가 바로 아포리아이다.
이 위기의 시대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지, 그리고 리더는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가 이 강연의 주제이다.
이번 강연 제목 ‘군주의 거울(Speculum Regia Mirror for Princes)’이란 것은 중세 유럽 군주들의 인문학 도서 장르로서, 8세기 프랑스 카롤링거 왕조 때 왕자와 봉건 제후 자녀들을 위한 인문학 고전 목록에서 출발했다. 당시 ‘카롤링거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들이 다시 발굴되었는데 ‘키루스의 교육’ ‘역사’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국가’가 대표적인 문헌들이다.
왜 이러한 고대 그리스의 고전들이 ‘군주의 거울’이 되었을까? 고대 그리스가 엄청난 위기와 변화의 시대를 여러번 겪었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리스에 닥친 첫 번째 아포리아는 기원전 499년~449년 페르시아 전쟁이었다. 페르시아군은 520만 명이었으며, 그리스 아테네의 군인은 인구의 1/3 가량인 10만 명에 불과했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이 전쟁을 기록했는데 아테네의 마라톤 전 승리는 우리가 잘 아는 사실이다.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의 승리를 이끌었던 인물은 밀티아데스 장군이었다. 지금 그리스 올림피아 박물관에는 마라톤에서 싸웠던 페르시아군의 투구와 밀티아데스 장군의 투구가 전시되어 있다.
마라톤 전투에 이어 기원전 480년에는 테르모필레 전투, 살라미스 해전이 일어났다. 살라미스 해전은 페르시아 전쟁의 최대 격전지였다.

세 번의 아포리아 겪은 그리스, 20세기 대한민국과 유사 = 그리스의 두 번째 아포리아는 기원전 431년~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그리스 민족 간에 벌어진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 그리스는 아테네 주도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 주도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으로 나뉘고 2개 동맹 간의 싸움이 벌어졌는데 한마디로 더러운 전쟁이었다.
이 전쟁 이전에는 서로 양심과 명예를 지켰지만 이 전쟁은 그렇지 않았다. 전면전보다는 대표 선수끼리 싸우거나 오후 6시 이후나 가을에는 전쟁하지 않았던 약속을 깨뜨려 버리고, 전면전, 섬멸전, 공성전이 펼쳐졌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집필한 역사가 투키디데스(기원전 460~395년)는 이 책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호메로스나 헤로도토스가 신화나 시를 얘기했다면 자기는 사실만을 기록할 뿐이며, 이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보겠다고 했다.
투키디데스는 “인간의 본성에 따라 언젠가는 반복될 미래사에 대해 명확한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내 역사 기술을 유용하게 여길 것”이라고 썼다. 또 “대중의 취미에 영합해 일회용 들을 거리로 쓴 것이 아니라 영구 장서용으로 썼다. 이 책은 인류의 고전이 될 것”이라고 했다. 사실 위기의 순간에 읽어야할 책이 있다면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꼽고 싶다.
그리스의 세 번째 아포리아는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내부 분열 때문에 독배를 마시고 죽은 사건이었다. 세 번의 아포리아를 경험했던 고대 그리스는 일제 침입과 한국전쟁을 겪었던 20세기의 대한민국과 유사하다.

크세노폰 『키루스의 교육』에서 리더십을 배운다 = 아포리아 시대에 리더는 어떻게 해야 하나? 헤로도토스의 『역사』,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플라톤 『국가』와 더불어 그리스의 ‘군주의 거울’로 꼽히는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에서 이를 찾아보자.
피터 드러커는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이 리더십에 관한 최고의 책이라고 극찬했다.
기원후 3세기 고대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철학자 열전』이라는 책에서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그의 충실한 모방자가 되려고 노력했다고 썼다. 또 플라톤과는 서로 호의적이지 않고 경쟁 상대로 지냈는데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은 플라톤의 『국가』를 반박하기 위해 쓴 책이었다고 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 의하면 플라톤이 ‘숙고하는 삶’을 살았다면 크세노폰은 ‘활동하는 삶’을 살았다. 크세노폰은 페르시아 내전에 참전해 고통을 겪었다. 플라톤이 잉크를 찍어 글을 썼다면 크세노폰은 눈물과 피를 찍어 글을 썼다.
소크라테스와 크세노폰은 아테네 아고라에서 처음 만났다. 크세노폰이 탁월함을 추구하는 사람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느냐고 묻자 소크라테스가 나를 따라오라고 했다.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말을 받아 적어 『소크라테스의 회상』이라는 책을 세상에 펴냈다.
크세노폰은 내전 중인 페르시아 왕조의 키루스 왕이 그리스로부터 2만 명의 용병을 모집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크세노폰은 델포이의 신탁을 받아 용병으로 참전했다. 기원전 401년 9월 쿠낙사 전투에서 1만 명이 몰살당하고 4명의 장군도 모두 전사했다. 적진에 고립되어 우왕좌왕하고 있는 용병들은 크세노폰을 새로운 지휘관으로 뽑고 탈출을 감행했다. 크세노폰은 용병대를 이끌고 흑해 연안까지 도착했는데 그 때가 기원전 400년 2월이었다.
이후 스파르타의 왕 아게실라오스 2세와 함께 그리스로 귀환했지만 아테네에서 추방당하는 신세가 됐다. 그러자 스파르타 세력권의 올림피아로 가서 망명 생활을 했는데 역사책을 쓰면서 노년을 보냈다. 이 때 쓴 책이 바로 키루스 대왕의 리더십을 살펴본 『키루스의 교육』이다.

크세노폰이 키루스의 리더십에 관한 책을 쓴 까닭은 = 크세노폰은 왜 이 책을 썼을까? 키루스 대왕은 알렉산드로스, 스키피오, 카이사르와 더불어 고대의 존경받는 지도자 4명중의 한명이다.
키루스 대왕(기원전 560~530년)은 세계 최초로 제국을 건설했다. 페르시아 제국이다. 성경에도 키루스 대왕의 이름이 나온다. 구약 이사야 제45장 1절에 나오는 고레스가 바로 키루스 대왕이다. 여기서 고레스는 여호와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 표현된다. 유대교에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메시아이다.
키루스 대왕은 바빌론에 끌려온 유대인을 해방시키고,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짓는데 지원하기도 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14장에서 “군주는 역사물을 읽어 위인의 행적을 연구해야 하며, 전쟁 시에 위인들의 승패 원인이 무엇인지를 검토해 모범을 삼아야 한다. 위대한 인물들은 자신 이전의 위대한 인물을 모범 삼아 그 행동과 업적을 좌우명으로 삼았는데 알렉산드로스는 아킬레우스를,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로스를, 스키피오는 키루스를 모범으로 삼은 것이 그 예다.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을 읽으면 스키피오의 일생이 얼마나 키루스 왕을 모방했는지를 알 수 있다. 총명한 군주는 위대한 인물들의 태도를 존중해야 한다”고 했다.
마키아벨리는 행운이 아닌 자신의 역량으로 군주가 된 인물 중 가장 뛰어난 인물로 모세, 키루스, 로물루스. 테세우스 등을 꼽았다.
키루스 대왕의 통치 지역은 그리스에서 인도까지 엄청나게 넓었다. 그 통치력의 배경은 자발적인 복종이었다.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에는 “모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키루스에게 복종했다. 아주 먼 곳에 살고 있거나 키루스를 한 번도 본적이 없던 사람들도 스스로 키루스의 백성이 되길 원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개인의 의지가 아닌 법에 의거한 ‘정의’ 실현 = 키루스 대왕은 어떠한 리더십으로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었을까? 키루스는 13세 때 메디아를 방문했는데 메디아의 왕은 그의 외할아버지였다. 외할아버지는 손주에게 큰 잔칫상을 마련해 주었는데 키루스는 혼자 다 먹지 않고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왜 그렇게 했냐고 묻자 외할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백성들에게 상을 준 것이라고 답했다.
위대한 인물은 타고난 것일까. 그렇다면 교육의 역할은 무엇인가. 키루스의 어머니는 키루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교육자였다.
한 일화가 있다. 키루스의 어머니는 키루스에게 페르시아의 정의는 어디서 배울 것이냐고 물었다. 키루스는 임시 재판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그 사건의 내용은 어느 덩치 큰 소년이 몸집이 작은 소년이 큰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마침 자기 옷이 작아서 몸집이 작은 소년의 옷을 빼앗아 바꿔 입은 것이었다. 이에 대해 키루스는 무죄라고 판결했지만 그의 선생님은 키루스가 정의를 어겼다고 매질을 했다. 선생님의 가르침은 누구에게 옷이 잘 맞는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옷인가에 대한 소유권을 판결하라고 한 것이니 정의를 어겼다는 것이었다.
키루스는 이 일화를 통해 법에 근거하는 것이 옳고, 판결로 정의를 내리는 사람은 언제나 법에 근거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군주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법에 따라야 한다는 소중한 가르침을 깨달은 것이다.
크세노폰은 플라톤의 ‘정의’에 대해 반박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통치자의 덕목은 지혜, 수호자의 덕목은 용기, 일반인의 덕목은 절제이며, 이 셋의 조화가 정의라면서 이상적인 국가는 이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크세노폰이 보기에 플라톤의 논리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다. 통치자의 본성이 나쁘면 이 논리는 애초부터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 크세노폰의 생각이었다.

동행하는 삶, 파토스의 리더십 = 『키루스의 교육』은 군주가 백성들의 자발적인 복종을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동행의 리더십을 강조한다.
충성하는 자에게 명예를 주고,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처별과 불명예를 주는 신상필벌 식의 리더십은 강제적인 충성에 이르는 길이며, 남들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함께 기뻐하고, 나쁜 일이 생기면 함께 슬퍼하고, 고통 받고 있으면 도우려고 노력하는 식으로 동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크세노폰이 보기에 이러한 동행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자가 이상적인 군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변증술의 세 가지 방법으로 로고스(Logos), 에토스(Ethos), 파토스(Patos)를 말했다. 리더십의 형태도 이와 마찬가지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로고스는 이성으로 설득하는 가장 낮은 단계이며, 파토스는 상대방의 감성해 호소하며 고난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고도의 단계이다.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은 파토스의 리더십을 보일 때이다. 오바마 미 대통령은 2015년, 백인 청년의 총격으로 죽은 흑인 8명 가운데 목사였던 한명의 장례식에 참석해 1시간동안 연설하고 마지막에 ‘어메이징 그레이스’라는 찬송가를 불렀다. 함께 슬픔을 나누고 눈물을 흘리는 오바마의 리더십은 새로운 미국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키루스 대왕이 보여준 전쟁의 기술은 먼저 공정한 경쟁의 보장과 합리적인 보상이었다.
그는 전쟁에 앞서 페르시아의 일반 군사들을 모아 놓고 “귀족들이 사용하는 무기를 똑같이 지급할 것이며, 적을 무찌르면 귀족과 똑같은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모든 사람이 균등한 보상을 받는다면 이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고 일갈했다. 일반 군사들이 귀족들과 경쟁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고, 공정한 심판관 역할을 수행한 셈이다.

평등한 기회 제공과 공정한 보상 = 리더는 조직 구성원보다 조금만 앞서야 한다는 것도 키루스 대왕에게서 배우는 리더십이다. 키루스 대왕은 전투를 앞두고 지휘관들에게 “군사들보다 너무 앞서 달리지 말라. 약간 빠르게만 이끌어라. 그래야만 군사들이 쉽게 따라갈 것”이라고 명령했다.
키루스 대왕은 실전에서는 상황에 따라 신속하게 전략을 바꿨다. 싸움의 장소가 달라지면 싸우는 방식도 바꿔야 한다면서 전차에 낫을 달거나 말이 낙타의 냄새를 싫어한다는 것에 착안해 낙타부대를 창설하기도 했다.
키루스 대왕은 파토스의 리더십을 갖춘 인물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최전방 장군을 불렀는데 그가 전사했다는 말을 듣자 바로 슬픔의 현장으로 달려가 통곡을 했다. 그 장군의 이름은 아브라다타스였다. 아브라다타스 장군의 부인은 동방 최고의 미인이라는 판테아였다. 판테아가 키루스 대왕에게 알현하자 키루스 대왕은 판테아의 얼굴을 보는 것을 피했다. 리더가 실수를 피하는 방법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키루스 대왕은 자신의 행복을 포기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춘 인물이었다. 장남에게 남긴 유언에서 “내가 아직 왕위에 있을 때 물려주는 이 왕위를 신의 선물로 받아들여라. 하지만 너는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그 까닭에 대해 “힘든 일에 집중해야 하고, 여러 가지 걱정거리에 괴로워하며, 제대로 쉬지 못하고, 경쟁에 시달리고, 작전을 짜고, 상대의 작전을 알아내야 하는 왕의 일이 결국 너의 행복을 방해할 것”이라고 했다.
크세노폰은 자기 시대에 관한 기록을 모두 마치면서 “아테네와 스파르타 양측은 모두 패자가 되었다. 전투가 끝난 다음, 그리스는 그 전보다 더욱 진한 불확실성과 혼란이 발생했다. 나는 여기까지 적는다. 그 다음 이야기는 다른 누군가가 적게 될 것이다”라고 글을 맺었다.


<박시현 기자> pcsw@bikorea.net

 

영림원 CEO포럼에서 강연된 내용은 ㈜비아이코리아닷넷의 [영림원CEO포럼]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http://www.bikorea.net/news/articleView.html?idxno=14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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