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茶山)을 읽으면 우리 시대 문제의 대안이 나온다”

95회 영림원CEO 포럼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다산의 생애와 사상” 주제 강연

 

“다산을 알면 미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미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미친 것이다”

40여년 동안 줄곧 다산을 연구하고 있는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은 4월 3일 열린 제95회 영림원CEO포럼에서 “다산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주제로 강연하면서 이 말로 운을 뗐다. 박 이사장은 “다산을 말하자면 1년은 할 수 있다”면서 이번 강연에서는 효제(孝悌), 독서(讀書), 용기(勇氣), 시혜(施惠), 근검(勤儉), 분속(憤俗) 등 다산이 사람이라면 반드시 갖춰야할 것이라고 강조했던 여섯 가지 덕목을 주로 얘기했다. 또 현재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남북간의 갈등을 비롯해 사회 부정부패 등의 문제는 모든 게 다산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면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산 읽기에 나서야할 것이라고 일침했다. 다음은 강연 내용.

 

“다산은 조선 역사상 매우 예외적 존재”= 다산 정약용은 조선 500여년 역사상 매우 예외적인 존재였다. 왜 그런가? 다산은 1762년에 태어나 1836년에 사망했다. 2012년은 다산 탄생 250주년의 해였으며, 2014년 4월 7일은 서세(逝世) 178주기이다. 요즘 일반 대중들조차 다산에 대한 연구열이나 관심이 매우 높다. 경기도 남양주에서 매년 열리는 다산 묘제에는 일반인 수백여 명이 교통이 불편함에도 몰릴 정도이다. 다산음악회에도 수백여 명이 즐비하다. 그만큼 다산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다산음악회가 무엇인지 의아해할 것이다. 다산은 음악을 통해 국가 통치를 강조했던 이 분야의 동양 최고의 이론가였다.

이렇게 다산에 대한 높은 관심도는 앞으로 우리나라의 발전에 한 요인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유네스코는 2012년에 다산을 세계기념 인물로 선정했다. 2012년 그해 유네스코가 세계기념인물로 꼽은 사람은 다산 외 루소, 헤르만 헤세, 드뷔시였다. 2012년은 루소 탄생 300주년, 헤르마 헤세 서거 50주년, 드뷔시 탄생 150주년이 되는 해였다. 다산은 유네스코의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됨으로서 세계적인 인물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우리 국민이 다산의 530여권의 저술 가운데 몇 권이나 읽었을까? 다산의 저술뿐만이 아니다. 우리나라 국민의 독서율은 매우 낮은 편이다. 일본의 독서율은 우리나라보다 16배나 높다. 독서율이 노벨상 수상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1명, 일본은 17명이 노벨상을 받았다.

 

다산, 200여년 전에 이미 모든 문제의 대안 제시 = 얼마 전 북한이 또 미사일 발사를 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거슬러 올라가면 다산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산은 목민심서(牧民心書) 서문에 “一毛一髮無非病耳(일모일발무비병이), 及今不改(급금불개), 必亡國(필망국)”라고 썼다. “나라가 털끝 하나 병들지 않은 것이 없다. 지금 당장 고치고 바꾸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할 것이다”라는 뜻이다.

조선의 지배층은 다산의 이런 경고를 듣지 않아 결국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다. 조선의 망국은 1910년부터 36년간의 일제 강점기로 이어지고, 1945년 해방이 되었건만 우리의 힘이 아닌 타의적인 뜻에 의한 까닭에 남북이 분단되고 이는 한국전쟁의 발발 원인이 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지금이라고 늦지 않았으니 정치인이나 공직자, 교육자 모두가 다산을 읽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다. 다산은 그가 살았던 시대에 만연했던 공직자의 부정부패와 부조리를 목도하고 그 대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다산이 제시한 그 대안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다산을 읽으면 기업운영, 국가계획, 사회보장제도, 의료제도 등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대안이 나온다. 다산은 200여년 전에 이미 이런 문제를 다 얘기했다.

제가 너무 다산을 치켜세우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제3자의 말을 들어보자. 조지훈 시인의 아버지 조헌영은 해방 이후 최고 한의학자였다. 조헌영은 다산이야말로 세계적인 의학자라고 했다. 허준이 지은 동의보감의 70%가 중국 자료를 인용한 것이었지만 다산이 지은 의학서 내용의 70%가 자기 의견이었으며, 나머지 30%만 외부의 자료를 인용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다산은 정직하고 솔직한 사람” = 자고로 남자는 장가를 잘 가야 하고 여자는 시집을 잘 가야 한다고 했다. 다산은 15세 때 한 살 연상의 풍산 홍씨와 결혼했다. 조선후기에 풍산 홍씨는 달성 서씨와 더불어 아주 잘 나가가던 성씨였다. 다산은 결혼을 하게 되면서 태어났던 경기도 광주(廣州)를 떠나 지금의 서울 회현동으로 거처를 옮긴다. 광주 깡촌에서 서울로 올라온 다산에게는 만나는 사람도 보는 책도 달라졌다. 서울 문물을 접하며 새로운 친구들을 사귄 다산은 성호 이익의 저서를 통해 학문에 뜻을 두게 되며 22세에 진사가 되었다. 28세에 문과에 합격해 벼슬길에 접어들고 한창 정치개혁이 논의되던 정조 시대에 임금의 총애를 받고 암행어사와 승지, 참의를 역임하고 곡산군 부사를 지냈다.

다산은 40세 되던 1801년에 신유박해 때 천주교도라는 누명을 벗지 못하여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 갔다가 18년이 지난 1818년 57세의 나이로 고향으로 돌아온다. 회갑을 맞아 자찬묘지명을 지어 일생을 정리하고 귀양에서 풀려나 집에 돌아온 지 꼭 18년이 지나 1836년 75세에 세상을 떠난다.

다산이 처음 귀양을 갔던 곳은 전라도 강진이 아니라 경상도 장기현 지금의 포항이었다. 다산은 장기현에 이르러 한 머슴을 만났는데 재미있는 일화가 전한다. 다산이 그 곳에 닿았을 때 많은 백성들이 병을 앓고 치료법을 몰라 죽어 나갔다. 그 머슴이 다산을 보자 “글깨나 아는 사람인 것 같은데 아픈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치료법을 만들어야지”라고 했단다. 그러자 다산은 “네 말이 맞다” 하면서 의서를 지었는데 그 의서의 이름이 村病或治(촌병혹치)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혹(或)이라는 글자다. 모든 병을 다 치료할 순 없고 간혹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요즘 같으면 만병통치약이라고 과장하겠지만 다산은 그렇지 않았다. 다산은 정말 정직하고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다산은 나중에 더 많은 의서를 참고해 ‘혹’자를 떼겠다고 했다. 아쉽게도 촌병혹치라는 의서는 지금 서문만 전할 뿐 원본은 찾을 수 없다. 다산은 나중에 마과회통(麻科會通)이라는 종두 치료 의서를 지었다. 다산은 의원은 무료 시술을 해야지 치료비를 받아서는 안된다고 했다.

 

“다산의 예언 적중…다산으로 돌아가야” = 다산이 목민심서(牧民心書) 서문에서 “一毛一髮無非病耳(일모일발무비병이), 及今不改(급금불개), 必亡國(필망국)”라고 했던 예언은 적중했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남북 분단으로 인한 고통은 심하며 언제 통일이 될지도 요원하다. 그래서 우리는 다산의 말을 되새기고 다산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산은 6남3녀를 낳았지만 살아남았던 자녀는 2남 1녀였다. 40세 귀양을 갈 때 큰 아들은 19세의 학연이며, 둘째 아들은 16세의 학유였다. 딸의 내력은 전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의 남존여비 사상 탓으로 보여진다. 다산에게 불만을 느끼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다산은 시집간 딸에게 결혼 선물로 그림을 주었는데 바로 매조도이다. 매조도의 글과 그림에는 딸과 사위의 금슬을 바라는 아버지의 심정이 절절히 배어있다. 유홍준 교수는 다산의 매조도는 국보급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다산은 귀양을 가면서 남겨둔 두 아들의 공부를 완성하지 못한 점을 안타까워 했다. 귀양지 강진에서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면 아들들이 제대로 커서 집안을 다시 세워야 할텐데 라는 걱정이 가득차 있다. 폐족(廢族)에서 벗어나는 것은 독서 즉 공부가 유일한 길이라는 게 다산의 생각이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당대의 문장가나 대학자가 되면 그 누가 무시하겠느냐는 것이었다. 폐족이란 조상이 큰 죄를 짓고 죽어 그 자손이 벼슬을 할 수 없게 되는 족속이다.

다산은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전인적(全人的) 교육을 했다. 전인적 교육이란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한 교육이었으며 요즘으로 말하면 인문학이었다. 다산에게 인문학은 修己之學(수기지학)이며 治人之學(치인지학)이었다. 나를 닦은 공부이었다. 그리고 남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봉사하는 공부였다.

 

지도자가 되는 길은? = 저는 1979년 교직에 재직할 때 다산의 여유당전서를 접하고 이를 통해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에는 지도자가 되는 길이 나온다. 다산은 목민심서에서 논어를 인용해 지도자의 기본을 논했다. 그것은 “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기신정 불령이행 기신부정 수령부종)”이었다. 자신의 몸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행하여지고, 자신의 몸이 바르지 못하면 비록 명령을 내려도 따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산은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효도와 우애를 강조했다. 바로 효제(孝悌)이다. 효제가 없이는 인간이 설자리가 없다고 다산은 설파했다. 그러면서도 자기 아버지는 물론 작은 아버지나 큰 아버지 모두에게 잘해야 진정한 효라고 했다. 그리고 말 보다는 행동으로 옮겨야 나가를 구원할 것이라고 했다.

다산은 효제와 더불어 자나 깨나 독서를 강조했다. 인간이 짐승과 구별되는 것은 책읽기라고 생각했다. 책에는 성현의 뜻과 행위가 담겨있기 때문이었다. 다산이 권장했던 책의 주제가 경세제민(經世濟民)이었으며 바로 여기에는 성현의 뜻이 담겨 있었다.

다산은 1801년 40세에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인해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지를 옮기게 된다. 그해 11월 강진에 도착했지만 어느 누구도 반기는 사람은 없었다. 귀양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진 동문밖에 있는 한 주막의 주모가 다산을 반기고 방 한켠을 내줬다. 다산은 이 때 시 한수를 지으면 마음을 다잡았는데 그 뜻이 “삶의 기회를 바꿀 수 있는 기회를 만났다. 이젠 아침저녁으로 책만 보고 저술을 남기자”였다. 제가 다산을 접하면서 최초로 느낀 감동의 장면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다산의 용기였다. 다산이 부활하는 장면을 여기서 봤다.

다산은 주모의 집에서 거하면서 그 대가로 그 동네의 아전의 자녀들 6명을 가르쳐 학자로 키워냈다. 이후 1808년 다산 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거기에서 양반집 자녀들 18명을 가르쳤다. 이렇게 해서 다산은 강진에서 24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현재 우리나라는 자살률은 높은 편이다. 다 용기를 잃어서 그런 것이다. 다산의 용기를 배워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재산을 오래 보관할 수 있는 길은 ‘시혜’ = 다산은 시혜 즉 베품의 정신도 강조했다. 남과 함께 살고 남과 함께 행복을 누리라고 했다.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눈이 오는 날이면 마을을 돌아 어느 집에 양식과 땔감이 필요한지를 헤아리라고 당부했다. 재산을 오래 보관할 수 있는 길은 있을 때 남에게 주는 것이며 그것도 어려운 사람에게 주는 것이라고 했다.

다산은 문과에 급제한 28에서 형조참의가 된 38세에 이르기까지 벼슬을 하면서도 돈과는 거리를 두고 부지런함(勤)과 검소함(儉)을 삶의 원칙으로 삼았다. 그러면서도 세속에 분개하라는 분속(憤俗)의 뜻을 일깨웠는데 시대를 아파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다산이 말한 6가지 즉 효제(孝悌), 독서(讀書), 용기(勇氣), 시혜(施惠), 근검(勤儉), 분속(憤俗)이 인문학이며, 이것이 사람되는 길이다. 사람이 되려면 마땅히 이 여섯가지를 지키고 행하여야할 것이다. 다산은 여기에다 28세 문과에 합격하고 나서 공평(公)과 청렴(廉), 단 두 글자로 생애을 마치겠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다산이 지금 우리에게 남겨준 뜻이다.

다산의 두 아들 정학유와 정학연은 아버지의 뜻대로 공부에 힘써 마침내 벼슬길에 나아가 폐족에서 벗어났다. 다산이 세상을 떠났을 때의 일이었다.
영림원 CEO포럼에서 강연된 내용은 ㈜비아이코리아닷넷의 [영림원CEO포럼]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http://www.bikorea.net/news/articleView.html?idxno=1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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