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회 CEO포럼]”‘論語’에서 리더십을 배운다”

‘論語’에서 리더십을 배운다

이한우 단국대 교수 제117회 영림원CEO포럼서 강연


이한우 단국대 인재개발원 주임교수가 7일 제117회 영림원CEO포럼에서 “논어에서 리더십을 배운다”를 주제로 강연했다. 이 교수는 “논어는 잠언집이 아니라 사람을 보는 책으로 리더십이 그 핵심 개념이며, 논어에서 말하는 리더는 사람을 볼 줄 아는 지인(知人)의 능력과 어짊(仁)을 겸비하고 아랫사람에게 너그러운 사람이다”라고 했다.


논어는 ‘리더 훈련서’ = 논어(論語)의 핵심어는 리더십이다. 그런데 시중에 나와 있는 논어 관련 서적을 보면 리더십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한 것은 없다. 중국의 시진핑이나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논어형 지도자이다. 논어형 지도자의 공통점은 기다릴 줄 알고, 참을 줄을 안다는 점이다.
논어에 대한 오래된 오해가 있다. 논어는 잠언집이며 저자는 공자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논어는 498편의 짧은 글들이 모자이크처럼 뭉친 한 덩어리로서, ‘사람보는 법을 담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 사후 100~200년 사이에 어떤 천재가 공자와 제자의 말을 취사선택해 아주 일관되게 엮었다.
논어 보급에 송나라 주자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는 것은 부분적으로만 맞다. 주자를 따라가면 논어의 맥락에서 벗어나 옆길로 새게 된다. 주자는 언어 감각은 뛰어나지만 사상의 수준은 높지 않은 것 같다.
사서삼경에서 논어의 지위는 산맥으로 비유하면 입구에 해당하는데 그 논어의 첫 구절이 ‘學而時習之(학이시습지) 不亦說乎(불역열호)’이다. 왜 이 구절이 맨 먼저 나왔을까?
논어에 대한 오해는 한자나 한문에 대한 그릇된 해석 탓이다. 종이가 나오기 전에 죽간에 기록했던 그 시대에는 100마디 중 엑기스만 압축해 쓸 수 밖에 없었다.
논어에서 학(學)은 배우고 묻다는 의미의 학문(學問, SCIENCE)이 아니라 학문(學文)이다. 문(文)을 배운다(學)는 것이다. 이 ‘문’은 논어의 핵심 개념이다. 문이라는 한자는 글이라는 뜻 외에 무늬, 매력, 포장, 애쓰다 등의 뜻이 있다. 문은 속의 것을 겉으로 발현하는 것이다. ‘문’은 여기 말고 논어의 여기저기서 자주 나온다. 문의 반대말은 질(質)이다. 질의 의미는 ‘바탕’이다. 공자는 문과 질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했다.
시(時)는 ‘때때로’가 아니라 ‘부지런히’이며, 역(亦)은 ‘또한’이 아니라 ‘정말로’라는 의미이다. 학이시습지불역열호는 “애써 배워서 시간 날 때마다 부지런히 그것을 읽힌다면 진실로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로 해석해야 한다.

“논어는 사람 보는 법을 담은 책” = 중국 한서(漢書)는 진나라 분서갱유 이후에 편찬된 역사책으로 단편적으로 이뤄진 논어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며, 논어를 심층적으로 인용 분석하고 있다. 여기에 임금에게는 3가지 유형의 신하가 있어야 국가가 건전하다라는 말이 나온다. 3가지 유형의 신하는 스승과 같은 사신(師臣), 벗과 같은 우신(友臣), 노예와 같은 예신(隸臣)이다. 이 가운데 사신은 리더가 막히면 길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는 신하이다. 조선시대 때 임금과 신하의 경연에서도 논어는 핵심 텍스트였다. 임금에게 배우고 익히기를 좋아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신하는 바로 사신이었다.
논어가 시작부터 학이시습을 얘기한 것은 논어가 리더 훈련서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논어의 두번째 구절인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도 같은 맥락이다. 유우(有友)가 아니라 유붕(有朋)이라고 한 까닭과 먼데서 왔다는 뜻을 알아야 한다.
임금은 궁 안에서 후궁, 내시, 측근 등 근신(近臣)에 둘러 싸여 있다. 임금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으로 밖에서 거슬리는 얘기를 듣고 와서 임금에게 말해주는 것이 붕이다.
논어는 크게 수기(修己), 지인(知人), 치인(治人) 등 3대 구조로 구성돼 있다. 나를 닦고, 남을 알며, 남을 다스리는 방법을 담고 있다. 그 중에 핵심은 남을 꿰뚫어서 아는 것 즉 지인이다.
보통 교언영색(巧言令色)이란 말을 부정적인 것으로 안다. 정확한 뜻은 교언은 말을 가려하는 것이며, 영색은 낯빛을 부드럽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겉으로 교언영색하면서도 어진 마음과 진심 즉 인(仁)을 가지고 대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이다. 이게 교언영색선의인(巧言令色鮮矣仁)의 바른 해석이다.
여기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4가지 유형이 나온다. 교언영색하면서 어진자, 교언영색하지만 어질지 않은자, 교언영색 하지 않지만 어진자, 교언영색도 하지 않고 어질지도 않은자가 그것이다.
이 교언영색을 설명하면서 나온 말이 사이비(似而非)이다. 비슷하지만 아니라는 뜻이다. 사이비의 판별법이 사람 보는 법이다. 논어는 중간까지 이 사람 보는 법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논어를 지인지감(知人之鑑) 즉 사람을 보는 책이라고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몇개의 예를 들어본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서운한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학이편 1장)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자신의 능하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 (학이편 16장)
“자신이 자리에 있지 못함을 걱정하지 말고 오히려 그런 자리에 가게 될 준비가 되었는지를 걱정하라. 자기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알아줄 만하게 되려고 노력하라” (이인편 14장)
“군자는 자신이 무능함을 병으로 여기고 남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아파하지 않는다” (위령공편 18장)

“논어, 지인(知人)에서 시작해 지인으로 끝나” = 논어의 마지막 구절은 “不知命 無以僞君子也 不知禮 無以立也 不知言 無以知人也(부지명 무이위군자야 부지례 무이립야 부지언 무이지인야”이다.
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고(지천명), 예를 알지 못하면 설수 없고(이립),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다는(불혹) 뜻이다. 여기서 이립(而立)은 자기를 먼저 세우고 나서 남을 세운다는 뜻(立己而立人)이다. 논어는 지인에서 시작해 지인으로 끝나고 있다.
논어의 사람을 보는 방법(觀人之法) 즉 사이비 판별법을 보자. 먼저 위정편 9장에 나오는 성기사(省其私)이다. 성기사는 사사로움을 살핀다는 뜻으로 공자가 제자 안회와 하루종일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안회를 어리석은 사람으로 여겼는데 안회의 사사로운 생활을 면밀히 살펴보니 결코 어리석지 않았다라는 말에서 나왔다. 공적으로 드러난 것 말고 속마음을 파악해 겉과 속이 일치하는 지를 살펴보라는 것이다.
공자는 위정편 10장에서 사람이 행하는 바(所以)를 잘 보고(視), 그렇게 하는 까닭(所由)을 잘 살피고(觀), 편안해하는 것(所安)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그 사람이 어찌 자신을 숨길 수가 있겠느냐고 했다. 이 구절은 논어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여기서 소안(所安)은 편안하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이 우러나서 저절로 하는 행위이다. 공자는 다른 사람들을 보고, 살피고, 곰곰히 들여다봤으면 다음 단계에서는 더 이상 의심하지 말라고 했다.
논어에는 사람을 보는 방법 4단계가 나온다. 계시편 9장에 나오는 생이지지(生而知之), 학이지지(學而知之), 곤이학지(困而學之), 곤이불학(困而不學)이다.
공자는 지(知)에 대해 지인(知人)이라고 정의했다. 나중에 주자가 지를 지식이나 지혜로 풀이한 것과는 달랐다. 지를 지인의 맥락에서 풀이하면 “나면서 사람을 볼 줄 아는 자는 최고요, 사람보는 법을 배워서 사람을 볼 줄 아는 자는 다음이요, 사람을 제대로 볼 줄 몰라(困) 사람보는 법을 배우는 자는 그 다음이요, 사람을 전혀 볼 줄 모르면서도 사람보는 법을 배우려 하지 않으면 사람으로서 최하가 된다”이다.
논어에서 지인이라는 개념은 곧 인사와 통한다. 리더가 사람을 제대로 알아봐야 제대로 된 인사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공자는 제자 번지가 지에 대해 묻자 “곧은 사람을 들여 쓰고, 굽은 사람을 제자리에 두면 굽은 자를 곧아지게 할 수 있다. 순임금이 고요를 들여 쓰고, 탕임금이 이윤을 들여 쓰니 어질지 못한 자들이 멀리 사라졌다”고 답했다.

“리더십은 仁과 知의 겸비에서 나온다” = 공자는 정치를 덕(德)으로 하는 것은 마치 북극성이 자기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뭇별들이 그에게 향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덕은 ‘다움’이다. 자식은 자식답고, 부모는 부모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임금은 임금다워야 한다. 자식이 자식다운 것은 효를 드려서이며, 부모가 부모다운 것은 자애를 베풀어서이며, 신하가 신하다운 것은 충(忠)과 경(敬)으로 윗사람을 대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자애 없는 부모와 불효하는 자식을 벌레라고 했다. 효, 자애, 충, 경과 같은 덕은 모두 어짊(仁)에서 나온다.
공자는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너그럽지(관, 寬) 않으면 무엇으로 사람됨을 알아보겠느냐고 했다. 논어에서 말하는 너그러움은 한 사람에게 여러 가지 재능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관의 반대말이 인색(吝嗇)이다. 인색은 한 사람에게 여러 가지를 요구하는 것이다.
공자는 지자불혹(知者不惑)하고 인자불우(仁者不憂)라고 했다. 지자는 의혹을 품지 않고, 인자는 근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공자는 지가 도나 이치에 미치더라도 인이 그것을 지켜줄 수 없으면 그 도나 이치를 잃게 된다며 인자가 최상급이며, 지자는 그 다음이라고 했다. 리더는 인과 지를 겸비해야 한다는 말이다.


<박시현 기자> pcsw@bikorea.net

 

영림원 CEO포럼에서 강연된 내용은 ㈜비아이코리아닷넷의 [영림원CEO포럼]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http://www.bikorea.net/news/articleView.html?idxno=13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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