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9회 영림원CEO포럼] 신뢰와 법치 사회의 구현

“공통 규범의 위반자에게 엄정한 제재 가하는 것이 신뢰사회 구축의 길”

정병석 한국기술교육대 명예교수, 169회 영림원CEO포럼 강연

 

정병석 한국기술교육대 명예교수가 2일 169회 영림원CEO포럼에서 ‘신뢰와 법치 사회의 구현’을 주제로 강연했다.

정 교수는 “법치와 신뢰를 기반으로 한 선진사회를 구축해야 나라가 지속 발전 가능하다. 법치와 규범이 어우러지는 나라가 선진국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는 국민 분열과 진영 싸움, 가짜 정보 범람, 사회 양극화가 시대의 풍경이 돼 버렸다. 법은 공정하지 못하다는 사고로 불신만 커지는 상황이다”라며, 왜 신뢰와 공정이 존중되지 않는지, 법치가 미흡한 요인은 무엇인지를 진단하고 이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했다. 또 사회가 국가를 견제해야 발전과 진보가 가능하다며 이에 맞춰 사회지도층이 해야 할 역할도 제안했다. 다음은 강연 내용

◆’대한민국은 왜 무너지는가’ = 2021년 초 내놓은 책 ‘대한민국은 왜 무너지는가’의 원래 제목은 오늘 강연 제목인 ‘신뢰와 법치 사회의 구현’이었다. 이 책은 2016년에 나온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1993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더글러스 노스(Douglas North)는 국가경제가 지속 발전하려면 좋은 제도를 갖춰야 한다고 했다. 법 제도와 같은 공식적 제도보다는 사회문화 또는 사회규범 이른바 의식, 가치관, 관행, 신뢰, 준법질서 등 비공식적 제도가 더욱 중요하며, 비공식적 제도가 인간의 일상생활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친다고 했다.

공식적인 법 제도와 사회문화가 함께 발전해야 사회나 국가의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하다. 한국은 법 제도 같은 하드웨어는 중시하지만 문화 등 소프트웨어는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급속한 경제 성장에 치중한 탓인지 사회문화의 발전은 미흡한 편이다. 이 때문에 법 제도와 사회문화 간의 격차가 확대되고 있다. 우리나라 국회는 입법은 많이 하지만 시행은 잘 되지 않고 있다. 만드는 데만 관심일 뿐 시행에는 무관심이다. 법을 이행해야 한다는 사회의식이 약하다.

아무리 좋은 법 제도 시스템이라도 법치가 실현되지 않고 신뢰가 없으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뒤처진 사회문화가 국가 발전의 발목을 잡는 셈이다. 우리나라는 법치 국가인가?라는 질문에 ‘난감’하다는 대답이 나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반 경제적 문화가 경제발전 발목 잡아 = 선진국은 오랜 역사에서 법 제도와 사회문화가 함께 발전해왔다. 우리 역사의 경우 제도적인 관점에서 경제 발전을 이루지 못한 국가의 사례를 볼 수 있는데 바로 ‘조선’이다.

조선의 지배층은 유학 이념을 신봉하며 농업을 중시하고 상공업을 억제하는 농본상말 정책을 폈다. 조선은 자급자족의 폐쇄 경제로 시장 형성을 억제했다. 그 예는 해상무역 금지와 대역무역 통제에서 볼 수 있다. 해상 무역이 번창했던 고려와는 달리 조선에서는 중국이나 일본으로 상선이 간 적이 없었다. 상공업을 경시하는 조선의 이런 반 경제적 문화는 조선의 사회가치관으로 자리잡았으며, 경제 발전의 발목을 잡았다. 게다가 조선은 인민의 30~40%가 노비인 신분제 사회로서 상인과 기술자를 천시하고 착취적인 수취 제도의 운영으로 결국에는 쇠망에 이르렀다.

이와 비슷한 해외 사례가 있다. 스페인이다. 스페인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전 세계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했다. 17세기 중반까지 해외에서 스페인으로 들여온 금과 은의 양이 무려 2만톤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 막대한 금과 은은 전쟁 물자, 성당 건축, 사치품 구입 등에 쓰이면서 산업자본화를 이루지 못하였다. 특히 상공업을 경시하는 풍조는 당시 상공업에 종사한 유대인들을 해외로 추방하는 일까지 빚기도 했다.

19세기에 외국인의 눈에 비친 조선인은 가난하고 게으르고 지저분했다.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조선은 좋은 기후, 토지, 자원에도 불구하고 매우 가난하다고 했으며, 영국 로스 목사는 조선의 법과 제도는 쥐어짜내기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했다. 특히 영국 지리학자 비숍은 조선을 방문해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책에서 조선은 착취적 제도로 쇠퇴했다고 했다. 그 예로 연해주로 건너간 조선인은 그 지역에서 가장 부지런하고 가장 잘 사는 사람들이었다며, 조선은 착취제도가 없으면 성공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했다.

◆신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대한민국은 ‘신뢰’가 낮은 사회다. LH 직원이 직무상 알게 된 기밀을 이용해 땅 투기를 하고, 교수가 가짜 인턴증명서를 발급한 것 등이 그 단적인 사례다.

소크라테스는 각 개인이 자기의 직분과 소임을 다하는 것이 ‘정의’라고 했다. 우리나라의 공직자나 지도층이 소임과 직분을 다하지 않은 것은 신뢰의 위반 행위다. 어떤 사회적 규범을 위반하면 그 위반자에게 제재를 가해야할 텐데 그렇지 않는 것이 우리 사회의 더욱 큰 문제이다.

한국에서 왜 ‘공정’이 문제가 되는가? 공정은 무엇인가? 공정이라는 ‘공평하고 정당함’인데 무엇이 공평한지, 정당한지에 대한 합의가 없다. 사회적으로 서로 논의와 합의가 없으니 공감하지 않는다. 사회의 핵심 원칙에 대한 공정한 합의와 신뢰의 기반이 부재하다는 얘기다. 우리나라에서 공정 문제가 제기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정의’라는 한 주제만을 파고든 미국의 철학자 존 보들리 롤스(John Bordley Rawls)는 ‘공정으로서의 정의’라는 저서에서 정의의 원칙은 공정한 절차를 거쳐 구성원간 합의하는 원칙이라고 했다. 절차적 정당성을 강조한 셈이다. 그는 자기와 상대방의 사회적 지위나 능력, 체력 등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원초적 상태에서는 누구도 자신의 특정 조건에 유리한 원칙을 제안할 수 없고, 구성원들이 서로 자유롭고 평등하게 논의해 공감할 수 있는 원칙을 합의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정의이며, 이렇게 도달하게 된 기본적 합의는 공정한 것이라고 했다.

하버드 대학교의 스티븐 레비츠키(Steven Levitsky) 교수와 대니얼 지블랫(Daniel Ziblatt) 교수는 공동 집필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에서 민주주의 위기를 진단하는 4가지 기준으로 △정치 지도자 언행: 민주주의 규범 준수 의지 △경쟁자/정당을 적으로 규정 △목적 달성을 위한 폭력의 묵인, 조장 △반대자 비난, 집회 금지, 언론 탄압 등을 들었다. 이 4가지 기준에 모두 해당하는 지도자는 트럼프이다. 상대 정당을 적이 아닌 경쟁자로 인정하는 ‘관용’, 법적인 권한 행사에도 절제하고 자제하는 ‘절제’의 자세가 트럼프 때 무너졌다는 게 두 교수의 주장이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지도자는?

신뢰라는 것은 공동체에서 서로 공통의 규범을 준수하고, 서로의 행동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형성된다. 신뢰사회란 규범을 지키는 사람이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 규범을 지키면서 수혜를 받는 사회다.

하지만 우리사회는 신뢰가 위기 상황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규범 준수에 대해 서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지도층은 소임을 다하지 않는 신뢰 위반 행위를 하고 있다. 특히 규범을 지키지 않는 자에 대한 제재가 약해서 잘 지키는 사람이 손해를 본다는 의식이 팽배하다. 자치 경험이 취약하고, 일을 맡기고도 권한을 주지 않는 것도 우리사회가 신뢰 부족이라는 위기에 빠진 이유다.

결론적으로 신뢰 사회를 구현하려면 △공정한 규범의 정립, 준수 △자치 제재 관행의 정립 △지도층부터 솔선수범이 필요하다.

◆법치가 구현되지 않는 이유는 ‘사회지도층의 법 준수 미흡’…법 제도의 엄정한 집행에 무관심한 사회 = 한국법제연구원이 2019년에 발표한 ‘국민 법의식 조사’에 따르면 ‘법치가 구현되는가’라는 질문에 긍정은 60.9%, 부정은 39.1%였다. 법치가 구현되지 않는 이유로 사회 지도층의 법 준수 미흡 47.6%, 부적절한 법 집행 20%, 권위주의 20.1%로 나타났다. 그리고 법관의 재판에 영향을 주는 요인은 법원 내 상급자 72.6%, 국회 70.9%, 대통령·행정부 60.3%였다.

법 제도는 이해집단 간에 오랜 세월에 걸쳐 상호 논의하고 그 결과로서 합의된 ‘게임의 규칙’이다. 즉 법 제도는 사회 세력 간의 대화와 타협의 산물로서 복잡하지 않고 간결해야 하며 공정하고 엄정하게 집행돼야 한다.

‘역사의 종언’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법치의 요건으로 법의 실질적 내용이 정당하고 공정한 절차로 확립돼야 하며, 특히 권력자나 부자를 포함해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법이 집행돼야 한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그간 법 내용의 정당성 확립이나 법 집행의 공정성에서 미흡한 점이 있었다. 특히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처럼 집행의 공정성은 계속 문제가 되고 있다. 법 제도의 신설에 관심이 많지만 엄정한 집행에는 무관심한 사회다.

우리사회의 법치 훼손의 사례는 입법권 남용과 불공정한 법 집행, 사업부의 공정성 문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 침해, 권력 분립을 저해하는 입법, 기업 경영의 자유와 국민의 재산권 보호 미흡, 절차를 위배하는 입법과 시장 기능 잠식, 그리고 법원, 헌법재판소, 선관위 등 사법부의 편파적 구성 등이 그것이다.

법치의 정립을 위해서는 △법령의 간소화 △공정한 법 집행 △사업부의 독립이 필요하다.

◆신뢰와 법치 사회의 구현, 사회지도층이 솔선수범해야 = 우리나라가 신뢰와 법치 사회를 구현하려면 무엇보다도 교수 학자, 언론인, 종교인, 전문직, 기업인 등 사회지도층의 역할이 중요하다. 사회지도층이 헌법에 보장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이해와 수호에 앞장서야 한다. 또 견제와 비판 기능을 제대로 갖추고 신뢰와 법치 원칙을 확립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해야 한다.

<박시현 기자> shpark@it-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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