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경영 속의 IT 기술] 데이터 경영의 탄생

  국민대학교 경영대학 남영호 교수 

 

지난 번 칼럼에서는 花無十日紅이라는 제목으로1980년대 일본 제품의 미국시장 침공(?)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그 당시 미국의 기업들은 오만과 방만에 빠져 있었다. 없어서 못 파는 시대가 지속되다 보니 소비자는 무시당했고 블루칼라 근로자들은 기업의 경영에 무관심하였다. 경영자들은 전문경영인이라는 미명 아래 스톡옵션 챙기기에 급급하여서 단기적인 주식가격의 등락에 온 관심을 쏟고 있었다. 뉴욕증권거래소가 미국 산업의 중심이 되었고, 결국 장기적인 경영전략은 실종되었다. 단기적인 주가 호재 만들기에 열을 올리는 와중에 일본 침공이 시작된 것이다. 특히 이러한 현상이 단기간에 일어난 것이기에 더욱 우왕좌왕 하면서 그저 무엇이 문제인지를 파악하느라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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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미국의 NBC 방송은 특집 프로를 만들었는데 제목이 우스꽝스럽다. “일본이 했다면 미국도 할 수 있다.”

그 당시의 미국산업계의 심정을 잘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 프로에서 일본 산업의 ‘기적’ 뒤에 숨어 있는 한 분의 학자가 소개되었다. 미국의 품질관리 학자인 에드워드 데밍 (W. Edwards Deming, 1900 ~1993)이 TV프로그램의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등장한 것이다. 미국 시청자들에게 생소한 이름이었다.

당시의 미국인들도 꽤나 궁금하였다. 패전국인 일본이 어떻게 40년만에 이런 경제적 기적을 이룩한 것일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 때 나타난 분이 Mr. Deming 인 것이다. 그는 벨 연구소에서 통계적 품질관리에 대한 연구를 하였으며, 1950년경에 경단련 (일본 경제단체연합회)의 초청으로 일본으로 갔다. 그의 이론은 당시로서는 매우 특이한 것이었다.

“모든 직원들은 자기가 만든 제품의 품질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지는 품질 책임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기업의 수익은 제품과 서비스에 만족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구매하는 단골고객으로부터 나온다.”
“품질향상은 실질비용을 낮춘다.” 등등

당시에는 품질향상에는 비용이 많이 든다고 통념이 지배적이었다. 당연히 이런 데밍의 이론은 미국에서는 전혀 인기가 없었다. 미국 제품은 세계 최고의 제품으로 인식되었고, 물건이 없어서 못 팔던 때이기에 고객중심 경영이론이 먹힐 리가 없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 기업들은 데밍에 열광했다. 그는 1950년 일본 과학기술연맹에서 주요 기업의 임원을 대상으로 자신의 품질관리에 대한 이론을 강연하였으며, 이 강연은 TV와 라디오를 통해서 일본 전국으로 중계 방송되었다. 이때 그는 “내 말대로만 하면, 일본이 수년 안에 세계시장을 장악하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당시 일본은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으므로 그가 시키는 대로 해도 손해 볼 것이 없었다. 그리고 배운 대로 미친듯이 실행에 옮겼다. 1951년에 그의 이름을 따서 세계 최초로 일본 품질관리상 제도를 만들었다. 바로 그 유명한 Deming Prize이다.

‘일본을 배우자’라는 기치 하에 일본의 경영방식을 모방하는 노력이 한동한 진행되었지만, 미국 산업의 경쟁력을 올리는 데에는 크게 유용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미국과 일본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산업구조, 부품 공급체계, 공장과 본사의 지리적 위치, 경영자와 노동자의 사고방식, 증권시장의 위상 등 미국은 일본이 될 수 없었다.

품질관리를 예를 들어보자. 일본의 경우에는 품질분임조 등을 통하여 전사적 품질관리를 실천할 수 있었다. 공정 별 작업자들을 5~10명씩으로 묶어서 품질분임조 (Quality Control Circle)를 구성하고, 이들은 품질, 원가, 납기, 안전 등에 관한 테마를 자율적으로 선정하고 토의하며, 그 결과를 본사와 논의한다. 경영전략의 일환이라기 보다 늘 일어나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의 토론장 역할을 한다. 이러한 품질분임조 활동은 미국 산업계에 꽤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본사와 아무런 상호작용이 없는 미국 공장으로서는 생각지도 못 한 방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본사와 현장의 상호작용은 미국 산업환경에서는 불가능하다. 본사와 현장이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출신배경이 완전히 다른 두 집단이기 때문에 만나도 상호 토의가 원만히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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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에 배경을 둔 두 번째 문제해결의 방식은 ‘미국식으로 해결하자’이다. 미국은 일본과 다르다. 예컨대 대부분의 일본 본사는 공장과 붙어있다. 경영기법도 이러한 지리적 특색을 반영한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보다 훨씬 넓다. 공장과 물류창고는 분산되어 있어서 본사의 지시가 일시에 공장으로 전달되기 힘들고, 반대로 공장의 문제점도 본사의 경영진에게 바로 보고되지 않는다.

미국 경영자들은 공장 스스로가 문제와 해결책을 찾는다는 방식을 수용할 수 없었다. 그 대신 그들도 방법이 있었다. 1930년대 GM에서 확립된 전통에 따라 본사가 공장의 문제를 찾아서 해결하는 것이다. 공장의 문제가 본사에까지 전달되기만 한다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실시간은 아니지만 문제가 발생한 시점으로부터 멀지 않은 시간에 본사가 이를 알아낸다면 되는 것이다.

사실상 미국 산업계도 공장의 작업효율을 올리기 위한 방안을 찾기에 골몰하였었다. 공장에서는 1960년대부터 초보적인 시스템인 자재소요 계산 시스템, MRP (Material Requirement Planning)를 사용하고 있었다. 더구나 1980년대에 전산시스템이 발전함에 따라 자재뿐만 아니라 공장 전체의 자원을 관리하는 제조 자원관리 시스템, MRP II (Manufacturing Resource Planning)까지 발전하였다. MRP II는 종이 문서로 주고받는 방식에서 오는 오류를 줄여줄 수 있는 획기적인 공장관리 방식이었다. ERP의 초보단계인 MRP II를 통하여 구매 주문, 자재 입고, 작업 지시, 생산일정관리 등 공장활동의 전산화가 시작되었다.

1960년대에는 시장이 안정적이어서 계획생산을 하였고 이에 따라 초보적인 MRP (여기서 M은 재료; materials의 약자)로도 충분하였다. 물론 데이터베이스관리시스템 (DBMS)과 같은 소프트웨어가 발달되지 않아서 더 이상의 전산화도 불가능하였지만. 그러나 1980년대의 시장상황은 달랐다. 시장수요는 요동을 치었고, 자재 공급원은 다양해졌으며, 공정의 효율성이 요구되었다. 자재뿐만 아니라 작업 공정, 작업자 일정 등을 총괄하는 관리가 필요해졌다. 제품 생산에 필요한 자재의 종류, 기술적 스팩, 자재의 조합 등을 일괄적으로 관리하는 BOM (Bill of Materials) 데이터베이스가 필요했다. 자연적으로 탄생한 것이 MRP II (여기서 M은 제조; manufacturing의 약자이고, MRP와 구분하기 위해서 II를 붙인 것임)이다. 전산화에 필요한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등이 뒷받침을 하면서 공장의 완전 전산화에 한걸음씩 다가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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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MRP II의 전체 흐름을 모델화한 것이다. 생산계획수립부터 시작하여 자재소요를 파악하고 제조에 투입한 후 제조공정 및 품질검사가 끝나면 제조가 완료된다. MRP는 이 그림의 앞 단계에 해당된다. 즉 재료와 공정 및 노무자원 등의 자재소요가 계산되어서 투입되기 전까지의 단계가 MRP이다. MRP II는 MRP 단계 이후 현장에서 재고파악을 하여서 필요하면 구매 오더를 발송하고, 작업지시가 전달되고 품질, 성능검사를 하여서 출하하는 시점까지 관리하는 것을 포함한다.

MRP II가 미국 공장에 설치되어감에 따라 효율적 관리를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공장의 생산과정을 전산화하여서 불량을 관리하고, 인력자원와 기계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이상적인 환경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관리가 본사에 전달되지 못 하고 공장 내에서 끝났던 것에 문제가 있었다. 당시의 통신환경 하에서는 세세한 원시 정보가 실시간으로 (real-time) 본사에 전달할 수 없었다. 수일, 수주간이 지난 후에 요약한 정보만이 본사에 전달되었다. 본사는 문제를 파악하였지만 상황이 끝난 후에 파악하였다. 문제의 근원을 파악하여서 개선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미국의 공장-본사 환경 하에서 이러한 기법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통신망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서 1930년대에 GM 경영진이 개발한 표준원가제도는 현장의 문제 파악에 효과적인 관리 기법이다. 실제원가와 사전에 설정한 표준과 비교하여서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해결책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현장 작업자들의 기억이 희미해 지기 전에 제공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의성이 없어진 사건을 들추는 꼴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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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산업계의 목표는 하나이었다. 본사가 현장 데이터를 신속히 획득하는 것이다. 1990년에 들어오면서 네트워크 기술이 발달하고 부가가치통신망, 즉VAN (value-added network)이 발달하면서 실시간의 꿈이 현실화 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VAN은 본사와 공장 간에 사설 네트워크를 이용하는 것이어서 기업 입장에서는 비용이 막대하였다. 기술은 충분히 발달되었지만 아직 경제성의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행운의 여신이 찾아왔다. 인터넷이 탄생한 것이다. 오늘날의 인터넷 기기들의 소통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 TCP/IP프로토콜이 실제적 국제표준이 되었다. 그리고 1989년에 물리적인 인터넷 망을 손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월드 와이드 앱 (WWW: World Wide Web)이 나타났다. 물리적 인터넷 망이 고속도로이라면 월드 와이드 앱은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배달시스템인 것이다. 월드 와이드 앱의 삼형제, 즉 주소체계 (URL), 데이터작성 언어 (HTML), 그리고 배달방식 (http)이 TCP/IP라는 고속도로를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인터넷이 완성되었고 사용자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통신산업이 발달하였다. 통신망 사용료, 즉 VAN사용료가 낮아지었다. 사용료가 낮아지므로 다시 사용자가 늘어나는 선순환이 일어났다. 이러한 선순환이 가속화되면서 요사이와 같은 실시간 통신이 일상이 되는 디지털 정보사회로 진입한 것이다.

미국 기업의 본사가 드디어 현장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결국 ‘미국의 문제는 미국 방식으로 해결한다’라는 뚝심 있는 전략이 승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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